일본은 초량왜관 설치와 동시에 3개의 신사를 건립했다. 용두산에 금도비라신사(고토히라진자)와 변재천신사(벤자이텐진자)를 세웠고, 용미산엔 옥수신사(타마다레진자)를 세웠다. 그 후 도하신사(이나리진자)와 조비내신사(아사히나진자)를 더 세워 초량왜관에 모두 5개의 신사가 있었다. 초량왜관의 신사들은 기복신앙적 성격의 제신들을 주로 모셨다. 금도비라신사와 조내비신사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사였고 변재천신사와 도하신사는 재물신과 상업신이었다. 용미산의 옥수신사만 유일하게 고대 전설적 무장과 관련된 신사였다. 출처 : 일본위키피디아 금도비라궁 이들 신사들 중 가장 중심적인 신사는 대마도주 요시자네가 용두산 꼭대기에 세운 금도비라신사다. 금도비라신사는 개항 후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되었다가 1899년 다시..
초량왜관엔 문이 3개 있었다. 연향대청에 잔치가 베풀어질 때 일본 사신들만 출입하는 연향문이 북쪽에, 죽은 일본인의 시신을 운반하는 수문(水門 )이 남쪽에, 초량왜관의 주요 출입문인 수문이 동쪽에 있었다. 초량왜관을 노래했던 지로우에몽은 수문(守門 )을 나서면 오른쪽엔 오륙도 왼쪽엔 산이 보인다고 했고 2정(약 216미터) 정도 걸어가면 자그마한 언덕들이 나온다고 했다. 변박의 초량왜관도는 지로우에몽의 묘사와 일치한다. 돌담을 꺽어 만든 수문(守門)의 오른쪽은 바다고 왼쪽은 산이다. 수문(守門)에서 해변을 따라 북쪽의 좀 떨어진 곳에는 언덕들이 보인다. 초량왜관은 동래부에서 발행하는 첩문을 가진 자가 아니면 출입을 할 수 없었다. 일본인은 수문(守門) 밖을 나갈 수 있었지만 제한된 구역이었고 석양 무렵에..
이름도 고귀한 / 오륙에 비치는 / 달빛이여 동향의 종을 치는 / 신을 맞이하는 / 사람일세 이 시는 1806년 초량왜관에 머물렀던 오가와 지로우에몽이 지은 단가다. 지로우에몽은 8개월 동안 초량왜관 머물면서 175수의 시를 썼다. 지로우에몽이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달빛에 비친 오륙도를 감상한 곳이 바로 왜관 내 사찰 동향사다. 지로우에몽이 남긴 글에는 또 다른 동향사도 하나 나온다. 가을 피안일에 고왜관(두모포왜관)에 성묘를 갔는데 그때 남긴 글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곳이 옛 동향사의 우물이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고왜관은 초량왜관 이전에 있었던 왜관이다. 동향사는 고왜관 시절부터 왜관 내에 확실히 자리잡고 있던 주요한 건축물이었다. 동향사에선 왜관에서 사망한 사람의 법요나 일상적 법회가 ..
1990년 일본은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궁중만찬회에서 한일우호를 강조하며 일본의 역사적 인물 한 명을 언급했다. 그런데 그 말 때문에 일본에선 난리가 났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말한 그 이름을 아는 일본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언급한 인물은 300년 전 조선외교전문가로 활동한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다. 호슈는 1702년부터 조선을 드나들었는데 1728년에는 실무외교에서는 최고의 직위라 할 수 있는 재판(왜)의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 유학자가 외교관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했던 쓰시마번이 유학의 나라 조선과의 외교를 유학자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외교관으로서 호슈의 사상은 지금봐도 놀랄 정도로 객관적이고 세련됐다. 호슈는 임진왜란을 대의명분이 없는 살상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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