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조선의 도자기 산업에서 불모지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막부에 보낼 도자기를 부산에서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조선이 일본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땅 초량왜관이 부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후 초량왜관 내에 가마를 만들어 조선 도공들에게 주문을 했고 일본 도공을 파견해 함께 만들기도 했다. 초량왜관 내에서 도자기를 만들던 번조소는 부산요라고 불리었다. 부산요에 대해선 아시가와 노리타카가 1930년에 쓴 란 책에 잘 나와있다. 아시가와 노리타카는 1913년 한국에 건너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국도자기를 연구하기 시작해 나중엔 한국도자기의 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가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은 현 국립민속박물관의 뿌리가 되었다. 과거 부산요의 위치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에 ..
용두산은 잘 알지만 용미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용미산은 용두산 앞 해변에 있던 아주 작은 동산으로 1936년 부산부청이 들어서면서 착평되어 사라졌다. 부산부청도 해방 후 부산시청이 되었다 1998년 시청이 이전하면서 철거되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롯데백화점이 들어섰다. 산과 몇개의 건물이 겹친 용미산 자리에서 옛날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쉽게 사라졌지만 용미산은 옛날 지도와 사진 등에 그 모습을 뚜렸이 남기고 있다. 용두산과 풍수지리적으로 쌍이 되어 어울렸던 용미산은 쉽게 잊혀질 수 없었다. 거기다 용두산처럼 용미산도 초량왜관 시작과 함께 신사가 설치되어 일본에게도 의미있는 공간이었다. 일본은 모금까지 해가면서 용미산신사의 보존과 유지에 애를 썼다. 용미산에 처음 세워진 신사의 ..
신사가 헐리고 1950년 전쟁 후엔 용두산에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1954년 대화재로 판자촌이 초토화 되어 철거된 후 1955년 용두산은 다시 공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름은 용두산이 아닌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공원이었다. 용두산이 그 이름까지 다시 환원된 것은 1960년 4.19혁명 후이다. 지금 이용하는 용두산 길들은 1915년 용두산공원이 만들어질 때 형성된 길들이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광복동에서 공원 올라가는 194계단 길에 지금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있다. 첫번째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는 지점에 미타선원이 있는데 그곳 법당에서 내려다보면 가림막에 둘러싸인 계단이 마치 용의 몸통처럼 산을 감싸고 올라가 용두산이란 이름에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풍경을 연출한다. 부산호텔에서 올라가는 길이..
일본은 초량왜관 설치와 동시에 3개의 신사를 건립했다. 용두산에 금도비라신사(고토히라진자)와 변재천신사(벤자이텐진자)를 세웠고, 용미산엔 옥수신사(타마다레진자)를 세웠다. 그 후 도하신사(이나리진자)와 조비내신사(아사히나진자)를 더 세워 초량왜관에 모두 5개의 신사가 있었다. 초량왜관의 신사들은 기복신앙적 성격의 제신들을 주로 모셨다. 금도비라신사와 조내비신사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사였고 변재천신사와 도하신사는 재물신과 상업신이었다. 용미산의 옥수신사만 유일하게 고대 전설적 무장과 관련된 신사였다. 출처 : 일본위키피디아 금도비라궁 이들 신사들 중 가장 중심적인 신사는 대마도주 요시자네가 용두산 꼭대기에 세운 금도비라신사다. 금도비라신사는 개항 후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되었다가 1899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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