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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은 잘 알지만 용미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용미산은 용두산 앞 해변에 있던 아주 작은 동산으로 1936년 부산부청이 들어서면서 착평되어 사라졌다. 부산부청도 해방 후 부산시청이 되었다 1998년 시청이 이전하면서 철거되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롯데백화점이 들어섰다. 산과 몇개의 건물이 겹친 용미산 자리에서 옛날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쉽게 사라졌지만 용미산은 옛날 지도와 사진 등에 그 모습을 뚜렸이 남기고 있다. 용두산과 풍수지리적으로 쌍이 되어 어울렸던 용미산은 쉽게 잊혀질 수 없었다. 거기다 용두산처럼 용미산도 초량왜관 시작과 함께 신사가 설치되어 일본에게도 의미있는 공간이었다. 일본은 모금까지 해가면서 용미산신사의 보존과 유지에 애를 썼다.

 

 

 

 

용미산에 처음 세워진 신사의 이름은 옥수신사(타마레진자)였다. 옥수신사엔 최초 타케우치노스쿠네(武內宿禰)가 제사 지내졌고 1819년엔 가토 기요마사가 합사되었다. 그런데 기복 신앙적인 용두산의 신사와 달리 옥수신사에 합사된 인물들은 한반도 침략과 관련된 무장들이었다. 타케우치노 스쿠네는 일본 서기에 신라 정벌의 총참모를 맡았다는 기록으로 등장하고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때 조선침략의 선봉에 서서 악귀 기요마사라 불린 장수다. 한반도에 주재했던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대한 무력적 우위를 용미산신사를 통해 내밀하게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미산신사

 

 

옥수신사는 그 후 용두산 중턱의 조비내신사(아사히나진자)를 합사하였다. 1878년엔 화재를 당해 응급수선을 하였고 1899년 일본 거류민 의회의 결의에 의해 용미산신사로 개칭되었다. 1908년엔 거류민들이 각출금을 모아 신사를 개축했다. 경내 주위를 석담으로 쌓아 지형도 크게 정리했다. 그러나 1934년 용미산이 부산부청의 새 부지로 선정되면서 용미산신사는 용두산신사 경내로 이전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부산부청

 

미나카이 백화점

 

 

용미산 자리엔 부산부청만 아니라 백화점도 들어섰다. 1937년 9월 부지 700평에 5층 건물의 마나카이 백화점은 당시 부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엘리베이터를 두 대 운행했다. 육이오 때 미나카이 백화점은 육군5병원으로 쓰이다 1965년 부산시에서 인수하여 상공회의소로 사용되었다. 상공회의소가 범내골로 이전한 1987년부터는 부산시청 별관으로 사용되다 1998년 부산시청이 연산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청과 함께 철거되었다. 그때까지 엘리베이터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용미산이 착평되고 더 높은 부산시청이 세워졌고 부산시청이 사라진 후 더 거대한 롯데백화점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란다. 그 뒤로 롯데호텔이 지어지는데 이 건물은 108층이다. 이 건물이 다 지어지면 부산항 앞바다에 500미터 높이의 거대한 구조물이 들어선다. 그러면 용두산에서 영도를 조망할 수 없게 된다.

 

용두산은 부산타워를 합해도 200미터 정도다. 몇년 뒤엔 용미산이 용두산보다 더 높아지게 되면서 천년을 넘게 이어져온 용두산·용미산이란 이름이 이제 무색해지는 것이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뭔가 거스르는 것 같아 찜찜하다. 롯데백화점 벽면 무늬가 일본인 관광객을 고려한 벚꽃문양이라는 사실은 이 찜찜함을 더 가중시킨다. 

 

 

다음 편엔 부산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념비의 전시장 용두산공원 - 초량왜관 9편

1945년까지 존재했던 초량왜관 건축물 용두산신사 - 초량왜관 8편

초량왜관 출입문 앞엔 매일 아침 시장이 열렸다 - 초량왜관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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