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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조선의 도자기 산업에서 불모지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막부에 보낼 도자기를 부산에서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조선이 일본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땅 초량왜관이 부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후 초량왜관 내에 가마를 만들어 조선 도공들에게 주문을 했고 일본 도공을 파견해 함께 만들기도 했다. 초량왜관 내에서 도자기를 만들던 번조소는 부산요라고 불리었다.





부산요에 대해선 아시가와 노리타카가 1930년에 쓴 <부산요·대주요>란 책에 잘 나와있다. 아시가와 노리타카는 1913년 한국에 건너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국도자기를 연구하기 시작해 나중엔 한국도자기의 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가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은 현 국립민속박물관의 뿌리가 되었다.





과거 부산요의 위치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부산요·대주요>에 부산요의 위치가 "오늘날 부산부립병원 자리"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부산부립병원은 현재의 로얄호텔이다. 





표지판의 오른쪽에 난 골목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길 끝에 로얄호텔이 서 있다. 로얄호텔은 현재 영업을 하지 않고 있다. 



1914년 부립병원



1930년대까지 부산요 자리는 부산부립병원이었다. 부산부립병원은 1876년 일본 거류민과 군속의 치료를 위해 설립한 제생의원으로 시작하여 1914년 부산부립병원이 되었다가 1936년 아미동의 현 부산대학교 병원 자리로 옮겼다.


제생의원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병원으로 알려진 광혜원보다 9년이 앞선다. 실질적으로 한국 최최의 서구식 병원인 셈이다. 해방전까지만 해도 대마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부산 부립병원으로 진료받으러 왔다고 한다. 





높게 선 로얄호텔에 꽉 막혀 답답한 느낌이 든다면 부산요를 다른 방향에서 조망할 수도 있다. <부산요·대주요>에는 "관수가 서남쪽에 변재천신사가 있고 그 서쪽 용두산 경사를 따라 번조소가 있었"다는 설명도 나온다. 오늘날 관수가 서남쪽으로 따라가면 변재천신사의 느낌을 주는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미타선원이다. 실제로 미타선원은 과거 변재천신사로 추정되고 있다.

 


1번이 관수가고 29번이 신당



변박의 초량왜관도도 <부산요·대주요>의 설명과 거의 일치한다. 관수가 서남쪽에 변재천신사로 추정되는 신당이 하나 그려져 있다. 다만 벽박이 초량왜관도를 그릴 당시(1783년)엔 부산요가 철거되어 신당 서쪽 경계선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불화가 그려져 있는 건물이 미타선원이다.





미타선원 옆으로 부산요 터로 알려진 로얄호텔 건물이 우뚝 서 있다.





과거 부산요가 있었음직한 자리는 로얄호텔처럼 비어있거나 철거된 건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부산 원도심이 활기를 되찾고 있지만 부산요 터는 아직 그 온기가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 부산요 터의 현재 처지는 부산요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부산요는 초량왜관보다 150년 정도 빨리 없어졌다. 1717년 흙의 부족으로 80년만에 문을 닫았다. 처음 선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에서 시작했지만 백성을 동원해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흙을 채취·공급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부산요가 문을 닫는 과정에서 불행한 사건도 있었다. 일본 도공 마쓰무라 야헤이타라가 도기제작이 어려워진 걸 비관하여 자결한 사건이 1708년 발생했다. 마쓰무라는 죽기 전 그는 조선식 큰 나무밥통 뚜껑에 교카 한 수를 써 놓아 동료들이 이 밥통으로 관을 만들어 장례를 치렀다. 그가 남긴 시는 이렇다. "어제까지 생명을 이어주던 밥통도 오늘은 꽝 하고 우는 석양의 종소리로다."


왜 이렇게 일본은 조선의 도자기에 열광했을까? 아시가와 노리타카의 조선 도자기에 대한 평가가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중국의 기물형태는 역학이나 수학에서 나온 모양인데, 어떤 기물은 제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기도 했다. "그릇을 보면 정치를 안다"라는 말조차 있다. 어용기물의 대부분은 권세의 주종관계에서 만들어졌다. 


이처럼 기물의 아름다움에는 권력이 느껴지고, 권력에 대한 희생의 냉엄함이 반드시 가슴에 와 닿는다. 이와 같은 힘을 가진 자의 소유로도 친구로도 그릇을 느낄 때도 있고, 또 투명한 이성의 아름다움으로도 생각할 때도 있다.


조선의 기물은 이와 달리 거북하지 않은 편안한 인간미가 있는 아름다움이다. 권세를 탐하지 않고, 명성을 바라지 않으며, 세월에 관계없이 평범한 곳에서 탄생한 온정의 아름다움이다. 투명하지 않은 곳에 춘광월야의 아름다움이 있다. 마음을 비운 곳에 하늘의 조화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표출했다.


고려다완이라고 하는 것은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승려들의 손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명기를 만들려는 목적을 위해 제작한 것이 아니고 사찰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든 것이다. 


승려들이 살아가는 특수한 환경에서 작자들이 모방할 수 없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다. 특수한 신분의 승려인 그들의 연습이 작품의 의도나 구상을 떠나 진정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것이다. 꾸밈이 없는 유유자적의 안정된 생활은 고승 대덕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 다완은 청빈의 벗이었다. 


<부산요·대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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