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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다고 '학벌주의'는 아니다


소위 스카이급 명문대를 다니지 못한 입장에서 고려대 동문을 거론한 고재열기자의 글이 불편한 건 사실이다. 연예인급 피디나 아나운서와 기자들 중에서 고재열기자의 동문들이 부지기수인 걸 보면서 그런 스타를 한 명도 찾기 힘든 대학출신들이 씁쓸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씁쓸함을 느꼈고 고재열기자는 동문애를 드러내면서 내 씁쓸함의 원인을 제공했다. 과연 이것만으로 고재열기자가 학벌주의를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불편함이 그의 학벌주의의 증거가 되는 것일까?

고재열기자의 학벌주의를 지적하는 글들이 고재열기자의 학벌주의를 증명하기 보다 자신의 느낌을 우선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학벌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분에 영향받는 성폭행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상대가 '동문'을 거론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학벌주의라고 한다면 이건 좀 곤란한 듯 하다.

학벌주의를 가장 명쾌하게 드러낸 영화장면이 있다. 영화 타짜에서 김혜수는 자신을 깔보려는 남자들 앞에서 "나 이대나온 여자야."라고 받아친다. 학벌주의는 이처럼 상대를 제압하려할 때 나타난다. 만약 고재열기자가 상대를 제압하려는 의도로 학교를 거론했다면 그땐 고재열의 글에 학벌주의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고재열기자의 글에서 고대가 자주 나오긴 하지만 거기에 상대를 제압할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일단 그 바닥이 학벌을 내세워서 야코를 죽일 수 있는 데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미 기자로 어느 정도의 명성은 얻은 고재열기자의 액면이 그런 학벌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고재열기자가 자신의 글에서 학교를 드러냄은 그야말로 '드러냄'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고재열기자가 학벌주의 혐의를 벋었다고 할 수 없다. 고재열기자가 학벌을 내세워 이득을 얻을 게 없다는 건 비판자들도 이미 알고있는 사실이다. 학벌주의 비판자들이 공격하는 지점은 '제압'이 아니라 '배제'이다. 배제야말로 학벌주의의 가장 큰 폐해인데 그런 '끼리끼리'의 모습이 고재열기자가 그의 글에 보였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주선해준 대학 송년회, 대성황을 이루다."라는 글에서 학벌주의에 대한 반감이 가장 컸을 듯 싶다. 고재열기자는 이 글에서 방송과 언론계에 포진한 십수명의 쟁쟁한 동문을 애정 깊게 소개했다. 아마 여기에서 일반인들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불편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도 사적 관계인 동문을 소개하는 것에 독자들이 불편하게 느낄 것이라는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기자의 감각이라면 이 정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데도 그가 그걸 감수하고 올린 데엔 다른 효과를 노린 게 있었을 것이다.


'고재열식 학벌주의' 비난에 답한다.


고재열기자가 1월12일 올린 '고재열식 학벌주의' 비난에 답한다.는 글에 이에 대한 답이 나온다. 고재열기자는 해직언론인을 돕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섭외할 필요를 느끼면서 동문을 적극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고재열기자는 이를 두고 보험영업방식이라고 말했다. 어떤가? 해직자 돕기 운동에서 이만큼 효과적인 전술이 있을까? 

고재열기자의 대학동문을 결집하는 방식은 파급효과가 크다. 고려대가 조승호후원회를 중심으로 결집하면 이를 본 다른 대학들도 경쟁적으로 출신 대학의 해직기자의 후원회를 만들게 될 것이고, 동문을 중심으로 결합한 소구심점들이 커다란 운동의 장에서 경쟁을 하면서 운동은 상승효과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건 나의 추론이 아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운동의 방향이다. 조승호기자의 동문후원회를 기획하는 찰라 떠오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필연적인 과정이다. 고재열기자가 선택한 동문을 파고드는 방법은 그만큼 효과적인 전술이다. 고재열기자가 같은 날 올린 포스트에서 이 전술은 이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언론노조가 별도로 정한 '술 마시는 날'은 언제일까?


고재열기자가 학벌주의 의도성이 없다는 반론에 양문석씨는 고재열기자의 개콘 리뷰를 인용하면서 "고기자가 강조하는 ‘저자의 의도성’도 중요하지만 고기자 글에서 ‘독자가 읽어내는 저자의 의도성’도 의미가 있"다고 충고한다. 

독자가 결과물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는 물론 중요하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결과물에 대한 평가 정도가 아닌 글쓴이의 학벌주의 의도까지 따질 정도라면 독자도 글쓴이의 반론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그건 독자도 읽기 오류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해야하는 주장이다. 학벌주의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말로 독자가 면피할 수 없다. 글을 입체적으로 읽지 못한 무능한 읽기도 분명 문제다. 

고재열기자는 언론탄압사태에 효과적인 글쓰기를 보여주고있다. 속도전과 진지전 등 현란한 전술로 적들이 정신을 못차리게 하고있다. 그러나 글쓰기만 유능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읽기가 무능하면 유능한 글쓰기는 효력을 상실한다. 탁월한 '소구심점'을 보여주었는데 뻔한 '학벌주의'만 읽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비판을 하지말란 말이 아니다. 관성적 비판으로 논란만 부풀리지말고 칼을 좀 더 날카롭게 갈아 단칼에 베고 빨리 다시 대응할 수 있도록 읽기에도 속도를 발휘하라는 얘기다. 

따지지마라. 분노가 우선한 시대에 사는 법은 좀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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