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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테레비 보다 깜짝 놀란 적이 여러번 있었다. 9시 뉴스 신호음이 나고 화면에 대머리 아저씨가 나타나면 갑자기 성냥갑이나 담배 같은 것들이 테레비로 날아가 부딪히면서 아버지의 불통같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저 개새* 저거 확 그냥 마..."

그럴 때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제발 살살 말하라며 어쩔줄 몰라하셨고 또 애들 앞인데 욕은 좀 하지 말라고 매번 당부하셨다. 아버지가 어머니 말을 들은 것 같진않다. 테레비 속의 전두환은 80년대 내내 계속 얻어터졌다.

당시 부산에서 아버지의 정치인식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85년 초에 치러진 총선에서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민정당에 압승을 거두었다. 당시 선거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사자성어가 여촌야도였는데 부산에선 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그외 큰 도시에서는 야당이 승리했다.

고등학교 때 가장 궁금한 것은 데모였다. 관제방송의 격렬시위에 대한 비판과 대학생들의 결의에 찬 모습에서 우린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렴풋이 이 정권이 나쁘다는 것은 느꼈던 것 같다. 우리의 여론은 전두환도 나쁘지만 대학생들도 좀 심하다 이런 정도로 정리되곤 했다. 전두환이 나쁘다는 건 항상 전제가 되었다. 정치적인 내용들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전두환정권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가 일단 전제되어야 얘기가 되는 분위기였다.  

한번은 영어선생 한분이 전두환이 표지로 나온 미국의 시사잡지를 들고와서 수업시간 내내 전두환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당연히 시위하는 대학생들에겐 욕을 퍼부어댔다. 그날 수업장면이 20년 넘게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걸 보면 전두환정권이 얼마나 인기가 없었던 정권인가를 세삼 느끼게 된다. 전두환을 싫어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지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었다. 그건 당시에 은따(은근한 왕따)의 지름길이 아니었나 싶다.

전두환정권은 역사상 가장 인기없기로 이름난 정권이다. 정권의 이런 최악의 지지율을 올리기위해 독재정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신문사 1면엔 전두환의 얼굴로 도배되었고 9시 뉴스에 전두환은 매일 첫번째로 '땡전'하며 등장했다. 땡전을 보기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저녁 9시엔 모두가 땡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만 전두환정권은 최악의 인기없는 정권으로 남았다.

독재정권이 장악한 언론들은 사회 문제를 지도자가 아닌 학생들의 데모탓, 북한 탓으로 돌렸다. 잘못된 건 남탓 잘된 건 전두환장군 덕분으로 언론을 완벽통제 했지만 정권의 인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신민당은 독재의 총칼을 뚫고 강력한 제2당으로 올라섰고 반정부 시위는 더 격렬해졌다. 그리고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땡전은 7년만에 실패로 끝난 것이다.





그런데 '땡전'이 실패로 끝난지 20년 만에 '땡박'이라는 말이 새로 유행하고 있다. 가락시장을 찾아가 할머니를 껴안은 이대통령의 장면이 거의 모든 언론과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한편의 신파극을 만들어냈다. 어떤 언론사는 가락동시장 장면으로 6-7개 꼭지를 뽑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얼마 뒤엔 이명박대통령이 자신의 월급을 기부하는 소리없는 선행을 했다는 연합뉴스 기사가 이어졌고 또 다른 언론사들이 대대적으로 받아썼다. 가히 땡박이라 할만한 언론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 기사는 < 조선일보 > , < 중앙일보 > , < 동아일보 > 등의 신문 홈페이지의 머릿 기사와 포털사이트 다음의 뉴스 편집창의 메인 위치에 배치됐다. 이들 신문들은 "새벽시장 간 MB, 시래기 파는 할머니 울자 목도리 건네며…"( < 조선일보 > ), "MB, 20년된 목도리 주며 '기도해야 하는데' 눈물"( < 중앙일보 > ), "가락시장 찾은 이 대통령, 좌판 할머니 울음 터뜨리자…( < 동아일보 > 등 더 '서정적인' 제목으로 바꿔달았다.

< 문화일보 > 도 이날 1면에 < 연합뉴스 > 못지 않은 기사를 냈다. < 문화일보 > 는 "대통령 앞 '눈물 쏟은 민심'"이라는 기사에서 "시래기를 파는 할머니 박부자씨는 이 대통령의 팔에 매달려 계속 울기만 했다"면서 "안쓰러웠던지", "눈시울이 붉어진", "그래도 발이 안떨어졌던지" 등의 표현의 사용해 이 대통령의 '선행'을 묘사했다.
연합뉴스 이비어천가 조중동이 울고가겠다. 프레시안 기사




며칠동안 지지율 올리기작전 명령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이명박대통령의 기사가 언론사 지면을 뒤덮었는데 그 효과는 있었을까? 지지율은 좀 나아졌을까? 최근 조사에 의하면 지지율은 그대로, 아니 조금 떨어졌다고 한다. 이벤트정치에서 있는 일시적 상승효과도 보지못했다. '땡박'이 기대했던 효과를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전두환정권은 모든 언론을 장악하고 방송과 보도 내용을 모두 통제하고도 땡전에 실패했다. 이명박정권은 땡박을 추진하기엔 전두환정권의 땡전에 비해 모든 여건이 불리하다. 주요 언론이 편을 들어주고 칭송하는 기사를 만들지만 일부언론은 여전히 비판적이다. 그리고 방송과 주요 언론에 맞먹으며 이명박정부의 통제가 어려운 인터넷이 있다. 땡전이 완벽한 통제를 하고도 실패했는데 이런 느슨한 통제로 땡박이 성공하겠다? 성공할 때까지 통제수위를 계속 높이실 계획인가? 이명박정부가 땡전의 실패를 다시 새겨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도박이 된다는것도 알아야 한다. 

이명박정부가 뭘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사태(?)에 하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전두환정권 때 10대로 살면서 몰랐던 그때의 역사를 20년이 지난 오늘 확인했다. 당시 언론들이 시대 탓으로 돌렸는데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잘못된 데에는 시대가 아닌 인간의 비열함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그때 저항했던 사람들에게 한없는 존경심이 생긴다. 그리고 시대와 타협한 건 쉽게 용서해선 안될 죄라는 것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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