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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때린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아내가 던진 첫마디다. 손예진을 골 때리는 여자로 보는 아내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둘이 저래가 살 수 있겠나?"

이 말은 가슴을 스치는 것 같았다. 여건만 된다면 저렇게 일처다부로 사는 것도 가능하단 말인가?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는 아내의 언어를 엄청나게 증폭시켜 조금의 미묘함으로도 내 가슴을 때렸다.  

"여자들도 일처다부로 사는 환상을 해보지 않나?"

이 말을 하는 나의 목소리가 마치 첫 미팅에서 만난 여자에게 건네는 음성처럼 떨렸다. 내 그런 목소리에 내가 놀라 그 뒤엔 의도적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얼마만에 아내에게 느껴보는 긴장감인가? 오늘 거사를 치른다면 이거 장난이 아닐 게 분명하다. 연애기분을 다시 느끼게 해준 이 영화에 고맙다고해야하나? 하지만 난 애태우는 관계는 싫다. 그런 관계는 솔직히 자신 없다.

그래서 <아내가 결혼했다> 참 보고싶지않은 영화였다. 어떤 분은 결국 극장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지 않은가.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에게 아내가 결혼한다는 설정은 아주, 정말, 너무 불편하다.

그런데 왜 봤냐구? "아내와 같이 본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뉴스가 재밌을 거 같았다. 블로거뉴스를 쓰기 위해 영화의 설정에 대한 불편한 맘을 꾹 참고 봤다.

영화는 아주 재밌었다. 잘 만든 영화였다. 영화 초반부부터 나의 불편했던 맘은 누그러졌고 어느새 킥킥거리며 영화에 빠져들었다.

두남편과 한 여자의 설정을 감독은 아주 매끈하게 이어붙였다. 관객들이 무리하게 느낄 고비들을 감독이 아주 자연스럽게 메꾸어 관객들이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갈 생각을 못하게 만들었다.

배우 중에선 김주혁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김주혁이 분한 노덕훈은 다른 남자와 나누어 차지해야하는 아내를 정말 그럴싸하게 원망하고 사랑한다. 두 남편과 한 아내의 관계가 어설프게 그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 관계를 이어붙인 김주혁의 연기 덕분이었다.

몇년 전 한겨레 창간일 특별판(맞나?)에서 이 영화와 비슷한 고민을 안겨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실제 기사는 아니고 미래의 예측 기사였는데 22세기의 남편이 다른 남자와 제한 없는 데이트를 즐기는 아내를 홀로 저녁을 먹으면서 유쾌하게 기다린다는 내용이었다.

미래가 아니고 만약 지금 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고 들어온다면 나는 어떻게 대할까? 기사 속의 주인공처럼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기사를 보고 한동안 그것에 대해 꽤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남들에겐 우스울지 모르는 이 문제가 내게 고민이 심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토론방이나 기사 댓글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지나치지 못하는 습관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입장정리가 되어야 논지를 펼칠 수 있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부부가 상대 하나만을 만족하고 평생을 살기란 사실 쉽지 않다. 그래서 동반자 외의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권력을 쥐고 있는 남자들이 여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외도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의 정절을 강조한다는 것은 위선적이라 할 수 있다. 부부간의 자유연애가 더 공정하고 타당한 주장이 될 수 있다.

그 기사에 대해 이 정도로 정리를 해두었다. 더 나아가서 부부의 자유연애를 부정하거나 각오하는 것은 별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 이상을 판단할 경험이나 지식이 내게는 없었다. 부부의 자유연애의 타당성을 그정도로 이해하고 넘어 간 것이다.
 



한겨레기사의 고민은 노덕훈이 이미 영화 초반에 극복한 문제들이었다. 노덕훈은 이미 아내의 연애를 허락하고 있었다. 그가 끝내 참지 못했던 것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노덕훈이 받아들여야할 것은 두 남편이 한 여자를 공유해야하는 불평등한 일처다부제였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고민은 한겨레기사보다 아주 더 많이 불편한 것이었다.

감독은 이 굴욕적인 상황에 처한 노덕훈에게 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자신이라는 것과 인아가 재경에게 빗속에서의 섹스를 허락하지 않은 순결(?)을 지켰다는 것으로 위안을 하고, 외도로 상처받은 누나와 어머니같은 여성들의 삶에서 일처다부제에 대한 불안함도 떨쳐준다. 남편을 내어주고도 살아가는 그녀들처럼 그도 아내를 내어주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노덕훈은 아내의 결혼을 받아들인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입장정리를 해야할까? 왜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하냐는 주인아의 말같지도 않은 소리에 어떻게 답해야할까? 세상을 다르게 보라는 주인아의 재촉에 어떻게 맞서야할까?

의외로 나는 간단하게 주인아에게 이길 자신이 있다. 주인아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이다. 주인아와 노덕훈의 관계는 백만년이 지나도 불가능한 얘기다. 

영화는 그들의 사랑에서 게임의 요소를 지나치고 그렸다. 사랑은 실제 감정보다는 게임의 요소에 더 크게 좌우된다. 우리는 상대를 사랑해서라기 보다 게임에서 패배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다. 

노덕훈도 주인아와의 게임에서 졌기 때문에 끌려가는 것이다. 주인아도 노덕훈의 여자를 슬쩍 따돌리는데, 만약 노덕훈이 그녀를 이용해 게임을 했다면 주인아는 절대 경재와 결혼할 수 없다.
 
그런데 영화에선 노덕훈만 게임에 애태우고 주인아와 경재는 게임에 별 생각이 없다. 셋 중에 하나만 게임한다고? 이건 영화 속 설정일뿐이다. 

게임의 법칙은 승자를 두명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와 연인을 공유하라면 아무도 그 게임에 뛰어들지 않는다. 고로 연애는 없다. 경재와 노덕훈 둘 사이엔 분명한 승자가 가려져야하고 패자는 그 상황을 절대 참아낼 수 없다. 내기 바둑에서도 살인이 오가는데 연애게임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일부 국가에서 일처다부가 가능한 것은 그들 나라의 연애가 게임이 아니라 권력과 금력에 영향받기 때문이다. 자유연애경쟁의 상태에 놓인 민주사회에서는 게임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에 결코 행복한 일처다부 또는 일부다처가 있을 수 없다. 

이 영화는 남성에게 끔찍한 상상이 여성에겐 끔찍한 현실이라는 걸 말해주는 효과가 있다. 노덕훈을 통해 일처다부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여자들의 삶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아주 효과적인 페미니즘 영화다.

"지하철 문닫는다. 빨리 안오고 뭐하노."

아내를 향한 나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일처다부는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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