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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먹는 우리는 잠재적 살인자.


잠시 한때 개고기를 꽤 먹었다. 체력에 부담을 느낄 때 사람들이 좋다해서 먹었다. 다른 고기보다 속에 부담이 되지 않아 사람들 하는 말에 이유가 있긴 있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먹지 않는다. 회식자리에서 올라오는 고기를 집어먹는 정도다. 그 이유가 개고기를 먹을 때마다 개운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미끌거리는 육질을 씹을 때마다 목 주위로 뭔가 스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 복실이라는 작고 털이 많은 개를 한마리 키웠다. 참 귀여운 놈이었다. 나를 제일 많이 따랐다.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문쪽으로 방향을 틀면  녀석은 그걸 금새 알아차렸다. 먼저 계단 밑으로(당시 우리집은 이층이었다) 뛰어가 아래에서 꼬리를 흔들며 나를 기다렸다. 나랑 산책 가는 걸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날도 그렇게 뛰어 내려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보통 때와 달랐던 것 복실이 바로 뒤에 차가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난 손짓과 함께 크게 소리쳤다. "뛰어가 빨리 복실아" 복실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소리와 행동이 뭔지 궁금해하며 처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차가 복실이를 덮쳤다.

내가 개고기를 먹을 때마다 스멀거림을 느끼는 것은 나와 함께하는 순간을 그렇게 반겼던 복실이의 그 눈빛 때문일 것이다. 복실이 뿐일까. 그간 살아오면서 내게 꼬리를 흔들고 손을 핥았던 강아지들도 내가 그 육질을 제대로 씹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뿐일까? 개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개고기를 먹는 데 이런 기억을 떨치지 못해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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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 찬성론자들은 개도 가축과 다를 게 없는데 왜 개고기 먹는 거만 그렇게 민감한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나 개는 분명히 보통의 가축과는 다른 데가 있다. 개는 사람과 같이 놀줄 알고 눈치도 곧잘 본다.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개가 사람하고 너무나 똑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개고기찬성론자들은 개가 가축이라고할뿐 개와 인간이 나누는 교감은 무시한다.

교감하는 생명체를 죽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노예무역이 한창일 때 노예 중 25%는 배에서 이동 중에 죽었다고 한다. 그들은 갑판 위에 쇠사슬로 묶힌 채 도착항구까지 그렇게 옮겨졌다. 잡힌 사람들이 배설한 오물이 그대로 갑판에 뒹굴었고 음식은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었다. 독일인들은 2차대전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총으로 장난하듯 쏴 죽이고, 독가스로 한꺼번에 대량학살하기도 했다. 죽은 사람들은 쓰레기처럼 포크레인에 의해 치워졌다. 아우슈비츠는 학살공장이었다.

쇠사슬에 묶인 채 갑판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아프리카인의 눈빛을 노예상인들은 어떻게 봤을까? 죽기 전 자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눈빛을 독인인들은 어떻게 물리쳤을까?

노예상인은 신이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종교적신념을 늘어놓았다. 독일인은 유대인이 그들과 다른 인종이라고 말한다. 신이 노예로 만들었으니까 죽어도 되고, 다른 인종이니까 죽여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를 먹으면서 그들이 가축이라고 변명 한다. 애처롭게 바라보는 아프리카인과 유대인의 눈빛을 무시한 노예상인과 독일인, 개와 나눈 교감은 무시하는 우리가 왠지 그들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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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시인의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 의 '개에 대하여' 에 나오는 글이다. 함민복시인이 예전에 형과 함께 개농장을 하면서 느낀 불편함에 대해 적었다.



우리는 죽이기 위해  생명체를 타자화 한다. 그것들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인간이니 죽여도 된다고 한다. 동물이라 죽고 인간이라 사는 게 아니다. 대상이 타자화 되는 순간 그게 동물이든 인간이든 살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은 타자화를 통해 살인을 정당화한다. 개의 눈빛을 외면하고 타자화 하는 우리는 언젠가 인간의 눈빛도 외면할 수 있다. 따라서 살인의 경계는 죽이는 대상이 인간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교감의 여부가 되어야 한다. 교감대상을 죽인다면 그것이 바로 살인이다. 개의 애처로운 눈빛을 외면하는 우리는 잠재적 살인자들이다.

소나 돼지를 먹기 때문에 공평하게 개도 먹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를 먹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소나 돼지를 먹는 것도 자제를 해야한다고 말하는 건 어떨까? 인간이 육식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쉽게 육식해선 안된다. 생명체인 닭 한마리가 500원도 안된다는 건 너무나 끔찍하다. 우리처럼 고통을 느끼는 그들을 먹으려면 그 몇배의 대가는 치르고 불편함도 느껴야 한다.

우리 개 먹지 말자. 인간과 교감하는 짐승을 그렇게 함부로 죽이지 말자. 개부터 먹지 말자. 살아있는 것을, 우리와 같이 고통을 느끼고, 우리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들을 그렇게 함부로 죽이지 말자. 사람을 위해 죽는 생명체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자. 동물에 대한 불필요한 폭력이 언젠가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의 고통과 생존욕구를 외면하고 타자화한 우리의 가치와 기준은 언젠가 우리 스스로에게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너무나 만연한 육식이 경계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 죽은 복실이를 거두지 못했다. 친구 말로는 찻길 건너 보신탕집 아저씨가 가져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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