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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은 코미디다

자동차도 함부로 탔다간 큰일 난다. 자동차 좌석 5개에도 분명한 순서가 있다. 5명이 다 타면 가장 상석은 운전수 옆자리이고, 그 다음은 뒷좌석 오른쪽, 뒷좌석 왼쪽, 마지막으로 중간좌석이다. 가끔 이걸 신경 안쓰고 탔다가는 이동하는 시간 내내 목 뒤쪽이 스멀스멀하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중간에 앉은 사람이 다리를 꼼지락거리거나 자리가 어쩌구 그러면 속으로 싸가지 없다라는 소리나 하는 건 아닌지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자동차 좌석에도 정치가 있다. 그만큼 정치는 너무나 일상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정치를 경멸하고 안 말려들려고 노력하지만 문밖을 나서는 순간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정치는 시작된다. 아니다. 가정에도 정치가 있다. 가정 정치 때문에 직장 정치에 곤란을 겪는 사람도 있다. 정치는 우리의 숙명이다.

하얀거탑 전반부를 보면서 나는 드라마 내내 배를 잡았다. 와이프가 코미디드라마 보는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다. 어이 없어서 웃은 웃음이 아니었다. 정말로 너무나 시원한 웃음이었다. 코미디를 보며 '정말 똑같다'며 소리 지르며 웃는데 우리의 일상에서 포착한 것을 드러낼 때 웃음이 된다. 하얀거탑을 보고 내가 웃었던 것은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너무나 흡사하게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가 안 웃긴 건 일상의 정치를 포장하거나 타인에게 떠넘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청자는 아름답다고 감동하고, 추악하다며 분노한다. 코미디가 웃긴 것은 일상의 정치를 그대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내게 하얀거탑 전반부가 코미디 그 자체였던 것은 일상의 정치를 드라마처럼 거리두기를 시도하지않고 코미디처럼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았지만 추악하지도 않았다. 나 자신의 모습이 아름다울 것도 추악할 것도 없다. 발버둥 치는 모습이 웃길 뿐인 거다.

유필상역의 이희도가 우용길역의 김창완에게 장준혁의 과장승진을 위해 "친구야" 하며 온갖 재롱을 떠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은 순간 낯설어했다. 일상과 정치를 구별하는 보통의 드라마와 달리 하얀거탑은 일상과 정치가 섞인 모습 그대로 보여주여 시청자를 잠시 당황케 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 속에 녹아있는 정치를 예리하게 끄집어 낸 드라마에 박장대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유필상처럼 딴청 피우면서 일상 속에 정치를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정치는 숙명이다

왜 장준혁이 저렇게 과장자리 때문에 힘든 정치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든 정치는 우리의 숙명이다. 자동차좌석 순서에서도 볼 수 있듯, 정치는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피해도 정치는 나의 뒤를 따라와 뒷통수를 친다. 정치는 쟁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도구다. 살기위해 정치하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이 아니라 생존이다.

머리가 좋아 시험만 쳤다하면 합격해서 공무원을 4번이나 붙은 사람이 있다. 4번의 합격 이력을 자랑하게 된 것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직장 정치 실패 때문이었다. 직장에 적응 못할 때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그만두고 다시 시험치면서 그런 이력이 쌓인 것이다. 결국 공무원 중에서도 가장 인기 높고 합격도 어렵다는 마지막 직장도 때려치웠다. 지켜봐서 알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정치를 싫어했다. 성격이 무던해서 남의 말에 아예 신경이라도 안쓰면 좋으련만 그것도 안되었다. 결국 정치에서 도망 치다 정치가 벌어지는 모든 것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정치를 멀리하게 되면 생존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꼭 정치불능자가 아니더라도 사소한 정치에 실패해 곤란을 겪는 사람을 주변에 흔히 본다. 대장원숭이의 바나나를 건드려 팔이 잘린 원숭이들이 있듯 사소한 정치실패가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그 몇 배의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를 못하면 이런 비효율적 정치를 감수 한다는 것을 실감하면 정치에 도저히 거리를 둘 수 없다. 생존하기 위해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장준혁이 과장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정치한 것은 과장자리를 얻지 못하면 생존을 위협받기 때문이다. 탈락은 장준혁에게 죽음이다. 탈락하는 순간 장준혁에게 기대를 품었던 장인과 부인은 돌아선다. 자신을 떠받들던 시선은 바로 다음날 측은한 시선으로 바뀌게 된다. 천재의사로서 기대와 자부심을 가졌던 그에게 이런 상황은 견딜 수 없는 생존의 위협이다. 우리가 하는 일상 정치와 장준혁의 정치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장준혁의 정치를 욕할 수 없었다.

하얀거탑에서 우리는 정치로 고통 받는 인간들과 그러면서도 정치로부터 도망치지 못하는 인간의 숙명을 보았다. 이 죽일 놈의 정치는 죽음 앞에서야 간신히 멈추는 척했다. 아마 죽음이 멈춘 것은 장준혁의 정치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정치를 멈춘 척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정치는 인류가 살아있는 한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애도했다.

정치적 숙명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장준혁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일상의 정치를 보다 단순하고 간소화 하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정치로 덜 고통받는 세상이 되었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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