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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이 느려지니 더 맛이 살아나는 김수현의 대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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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째거리는 거 시끄럽다. 딴데 돌리라. 저 아줌마 드라마는 하루종일 떠들기만하고."

'엄마는 뿔났다.'를 보고 있는데 와이프가 던진 말이다. 여자들은 김수현 드라마 좋아한다 생각했는데. 이 드라마에 대해 그와 내가 일치한 것이 조금은 신기했다. 내가 '엄마는 뿔났다'를 보는 것도 사실은 김수현드라마를 비판하는 리뷰를 한번 써보기 위해서였다.

' 목욕탕집 남자들' 때부터 그의 드라마는 나의 시청거부 리스트에 올랐다. 당시 그 드라마는 최고의 시청율을 기록했다. 채널을 돌리면 시도 때도 없이 걸렸는데, 그때마다 쏘아대는 따가운 대사들에 나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연기자들은 김수현이 할당한 대사를 처리하느라고 전부 숨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상대의 대사가 언제 끝나나 지켜보며 자신의 대사를 기다리는 연기자들 눈빛이 빤히 보였다. 연기자가 아니라 대사치는 기계였다. 연기는 안보이고 대사만 들렸다.

도대체 이 여자가 어떻게 다루길래 애(?)들이 이렇게 대사에 목을 매는 걸까? 언론에서 간혹 전해주는 이 여작가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김수현은 독재자였다. 드라마를 작가의 놀이터로 알고 있는 그가 더 싫어졌다.

배우가 대본에 나온 쉼표 하나라도 그대로 표현해내지 않으면 ‘요절’이 날 정도로 정확성을 요구하고, 어설픈 애드리브를 했다가는 호통이 날아온다. 하지만 누구도 김 작가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혼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기현상은 김수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60대 김수현, 30년 TV 드라마 장악의 힘)


김수현드라마의 연기자는 모두 말을 잘한다. 속사포에 논리도 정연하다. 말 못하는 캐릭터도 간혹 있지만 그 캐릭터도 지 말할 땐 똑부러게 청산유수다. 이렇게 캐릭터들이 말 잘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김수현의 복제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김수현 자신이 엄마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 세상만사 온갖 것에 자기 생각을 늘어놓고 있었다.

연기자는 대사에  색깔을 칠하는 역할만 주어졌다. 아버지는 파란색, 엄마는 녹색, 딸은 빨간색, 아들은 노란색, 이런 식으로 연기자는 대사를 구분하고 소리를 내는 장치로만 쓰였다. 자기호흡을 하는 연기자는 김혜자가 유일하다시피했고 나머지 캐릭터들은 김수현 대사의 선율 위에 달린 콩나물 대가리 처럼 느껴졌다.
 
영상은 잘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귀만 따가운 드라마라면 굳이 영상매체 올릴 필요가 있을까? 그냥 라디오드라마로 쓰면 더 성격에 잘 맞을텐데. 쓰면서 찾아보니 김수현씨는 68년 라디오드라마작가로 데뷔했다고 한다.

자 여기까지가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머리 속에 정리한 이 리뷰의 전반부다. 난 여기에  '엄마가 뿔났다'의 몇가지 장면을 인용해 비판적 리뷰를 만들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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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판하려고 보던 '엄마가 뿔났다'에 그만 내가 정신없이 빠져버린 것이다. 4월 19일 23회에서 영수의 결혼을 두고 벌어지는 세모녀의 장면에 나는 눈물마저 찔끔 흘렸다.

이 드라마부턴지 아니면 예전 어디서부턴지 그건 모르겠지만 김수현 드라마가 변했다. 내가 치를 떨었던 '목욕탕집 남자'와 '엄마가 뿔났다.'는 많이 다른 드라마였다.

대사의 호흡이 느려졌다. 예전엔 바로 치던 상대의 대사가 반박자 정도 늦춰졌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도 대사로 안하고 독백으로 치면서 연기자들에게 한숨돌릴 시간을 주었다.  영상표현도 많아졌다. 카메라도 요리조리 다양한 각도로 대사가 아닌 심리상태를 포착하는 장면이 많아졌다.

확실히 대사의 부담을 덜어주면 연기자들이 연기를 펼치기 편하다. 호흡이 느려지고 영상표현이 많아지니 연기자들도 연기에 여유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김혜자나 중견 연기자를 제외하곤 다들 대사 외우기에 바빴을텐데, 이젠 류진이나 신은경같은 급도 자기 연기를 하고 있었다. 김수현의 따따거리는 대사를 타고 날라다녔던 캐릭터들도이제는  스스로 명얌을 만들면서 무게감을 가지고 땅에 내려 앉았다. 캐릭터에 무게가 실리니 대사는 더 맛이 났다.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치고나오는 대사 덕분에 장면을 음미할 새도 없었던 대사의 맛이 이제는 느껴졌다. 그러자 예전엔 소음처럼 들리던 대사들이 귀를 맴돌았다. 아 이게 김수현 대사의 힘이구나. 어쩜 영수 엄마 한자가 했을법할 말을 그렇게 귀신같이 찾아내서 귀를 울리는지.

예전엔 김수현작가가 영상을 믿지 못한 것 같다. 자신 혼자서 드라마를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고 그래서 드라마를 영상과 분담하지 않고 대사로 채워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드라마의 영상이 발전하면서 영상을 신뢰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신의 드라마를 영상과 분담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조금 더 분담했으면 한다. 아직 나이 어린 연기자들의 경우 대사를 치는 것이 티가 난다. 그들도 풀어주면 어떨까. 연기자들이 좀 더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대사에 치여 몰랐던 김수현의 그 아름다운 대사들이 보다 맛깔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연기자가 올라탄 대사보다 연기자의 캐릭터 위에 올린 대사가 더 빛나는 법이다.

김수현작가 쪼끔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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