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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데이미언에겐 민족이나 이념이 없었다. 그는 그저 의사로 살기를 바랬다. 동네 17살짜리 아이가 영국군에게 맞아 죽었을 때도 그는 변함 없었다. 오히려 소년이 영어로 말했으면 살았을 거라며 죽은 소년을 탓하기 까지 했다.

데이미언은 의사로 살기로 한 자신을 나름대로 합리화 했을 것이다. 민족이란게 부질없다 생각도 했고, 어차피 세상은 하나의 인류로 살아가게 될거라며 자위했을 법하다. 아일랜드말로 이름을 말하길 고집한 17세 소년이 불쌍하기보단 어리석어 보였을 것이다.

의사로서 개인적 삶을 살고자하는 데이미언에게 자꾸 나타나는 조국의 처참한 현실은 심히 짜증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보는 앞에서 17세 소년까지 죽어버렸다. 데이미언으로선 많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래도 소년을 비난해선 안되었다. 그게 바로 화근이었다.

학교로 떠나는 기차역에서 목격한 아일랜드인의 처참한 장면에서 데이미언은 마침내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고 말았다. 더는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무자비한 영국군 앞에서 절대 태울 수 없다며 버티는 기관사와 승무원을 그는 더 이상 어리석다 할 수 없었다. 반면 영국군이 다가오자 신문 사는 척 도망갔던 자신의 꼬락서니는 비겁한 것이었다.  결국 데이미언은 IRA공화국군에 입대한다.

만약 소년을 비난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말 않고 같이 아파만 했더라면 데이미언은 이 전쟁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약함은 변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저 주변의 이해만 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년의 죽음을 두고 세계관의 차이라는 식으로 자신을 변호하려는 의도에서 비난해버렸다. 그 조잡한 세계관은 당당히 저항하는 기관사 앞에서 일순간에 무너져버렸다.

여기까지도 괞찬다. 어쩌면 그는 적당히 저항군에서 활동하다 생각의 차이를 이유로 다시 의사로서의 삶에 복귀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크리스만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살았을 수도 있었다. 또 그 염병할 세계관이 문제였다 이전에 죽었던 소년만큼 어린 밀고자 크리스를 죽이면서 데이미언은 "조국이 그만한 가치가 있겠지"라고 중얼거린다.

소년의 죽음을 비난하고 크리스까지 죽여버린 데이미언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크리스를 죽이게 만든 조국이 의미를 찾기전까지 그는 산을 내려 갈 수 없었다. 아일랜드가 독립했지만 그 조국은 크리스의 죽음을 정당화하지 못하는 조국이었다. 여전히 민중은 굶주렸고 독립은 불완전했다. 여기서 그냥 내려가면 데이미언은 크리스를 죽인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조국도 벅차하던 젊은 청년이 어느새 이념까지 책임지게 된 것이다.  결국 데이미언은 조국으로 충분했던 형 테디에 의해 사살당한다.

'보리밭에 부는 바람'은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전사가 되는 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인간이 감히 세계를 함부로 재단하면 어떻게 되는 가도 보여준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인간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이 난해한 세상을 규정하려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죽음을 당했던가. 데이미언은 어느 순간엔가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어야 했다. 세상을 판단하고 규정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내버려 둘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자신이 살고 더 많은 사람을 살게 할 수있는 길이다.

* 보리밭에서의 죽음 장면은 무섭다. 죽음에 암시는 없다. 죽는 사람은 죽기 전까지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르고 곧 살것처럼 떠들거나 행동한다. 그게 무섭다. 논쟁을 벌이다 죽고 총알을 재장전하다 죽는다. 누군가의 일상이 멈추고 그들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일상이 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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