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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뢰를 보내는 사람들을 잘보라. 그들은 고통을 당해본 사람들이다. 고통을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불안하고 왠지 미덥지 못하다. 우린 고통을 흔적인 노인의 주름살을 보면 편안하다고 얘기한다.

교도관인 폴(톰행크스)은 소변을 볼 때마다 면도날로 베는 듯한 요도염의 고통으로 거의 실신을 할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 고통을 알기 때문에 폴은 타인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아파하는 사형수 존 커피가 두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다.

커피는 자신의 초능력으로 폴의 요도염을 고쳐준다. 폴은 커피를 교도소 소장집에 데려가 소장 부인의 뇌종양을 고친다. 고통이 클수록 깨달음도 큰 것일까. 폴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았던 그녀는 자리를 일어서자 마자 마치 여신같은 모습으로 커피를 쓰다듬어 준다. 오히려 커피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 것 같은 자태이다. 고통은 공명하는 것이다. 

고통 중에서도 질병의 고통이 주는 깨달음이 가장 크다. 질병의 고통은 탓할 가해자도 없이 그저 움켜쥐고 참아내야 한다. 아무 때나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끝날 기약도 없이 찾아온다. 

쥐를 밟아 죽인 교도관 퍼시는 고통을 모른다.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즐긴다. 퍼시는 커피가 뱉지 않고 가져온 소장부인의 고통을 받아 마시고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미쳐 버린다. 퍼시같은 나약한 인간에게 소장부인의 고통은 감당해내기 힘든것이다. 

폭력의 고통은 질병과는 다르다. 아프긴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한다. 곧 사람들은 요령껏 피하는 방법도 배우고 오히려 폭력을 배우게 된다. 여자아이 둘을 죽인 와일드 빌의 폭력도 태생적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서 받았고 배워서 써먹은 폭력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건 기독교가 잘못 퍼뜨린 교리이다. 이 교리를 비웃듯이 감독은 퍼시의 총으로 와일드빌을 통쾌하게 죽여버린다. 일순간 관객은 당황하게 된다. 거기에 대한 존 커피의 대답은 이렇다. “그는 사랑을 담보로 자매를 죽였다” (와일드 빌은 어린 자매들에게 사실대로 부모께 얘기하면 그러니까 언니가 이야기 하면 사랑하는 동생을 동생이 이야기 하면 사랑하는 언니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와일드 빌은 존 커피가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사랑을 담보로 행한 살인은 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죄였던 것이다.

뉴욕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이해하고 앞으로 그런 고통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이들의 고통을 이용해 보려는 사람이 있다. 커피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랑을 담보로 살인하려는 행위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고통이 이해되어 신뢰로 발전되지 못하고 희생자에 대한 가족과 시민의 사랑이 폭력의 명분이되어 아프간을 폭격하고 있다. 미국의 와일들 빌들이 살인을 부추기고 고통을 모르는 퍼시같은 사람들은 어쩔수 없다며 이 전쟁을 부추긴다.

존 커피가 체포된 건 그가 자매들이 죽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빈 라덴 때문에 아랍사람들은 길에서 돌을 맞는다. 아프간 사람들은 라덴이 그 땅에 있기 때문에 폭격을 당한다.

사람들의 고통을 그냥 보지 못하는 순수한 영혼의 커피는 피곤하다며 오히려 죽음을 원한다. 그가 아파해야할 엄청난 고통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을 그는 떠나고 싶어한다. 영화는 곳곳에서 고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기의자에서 온몸과 내장이 타들어갈 정도로 고통에 몸부림 치다 죽는 델의 장면은 감독이 맛좀 보라며 관객을 괴롭히기로 작정한것 같다. 그외에 폴이 요도염에 실신을 하는 모습, 그 고통의 장면을 말없이 지켜보는 폴의 부인, 소장부인의 고통에 절은 얼굴, 옆에서 그 고통을 바라봐야 하는 소장의 지친 얼굴, 손가락이 부러져 소리치는 델, 와일드 빌에게 공격당해 쓰러진 젊은 교도관 영화는 인간의 고통에 절규하는 모습을 너무나 선명하게 여러차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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