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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조선이 개국했다. 고려가 망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의 장내마을에는 작은 고려가 남았다.   



고려를 남긴 사람은 이오(李午)다. 이오는 정몽주와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공양왕 때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시기가 적합하지 못하다고 사양한 선비다.



조선이 개국하자 이오는 자신이 고려의 유민임을 주장했다. 유민임을 표방하기 위해 고려동을 지어 담장 안쪽은 고려 유민의 거주지고 담장 밖은 조선의 영토라고 하면서 담장 밖에서 나오는 곡식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백이숙제가 주나라의 것은 먹지않겠다 하여 고사리만 뜯어먹다 죽었는데 이오는 백이숙제보다 업그레이드 된 방식으로 조선왕조에 저항한 것이다. 

 


이오의 조선왕조에 대한 저항은 죽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자신의  신주를 고려동 밖으로 옮기지 말라고 유언했고 묘지는 고려동 담장 밖에 쓸 수 밖에 없었는데 대신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유언했다. 실제로 가야읍 인실마을 뒷산에 한 글자도 새기지 않은 이오의 백비가 서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의 묘비에 무;슨 말을 쓰겠는가, 내가 죽으면 할 수 없이 담장 밖에 장사할 것인즉 혹 조선의 땅에 묘비를 세울 경우 내 이름은 물론이고 글자 한 자 새기지 말라"



그뿐 아니었다. 이오의 저항은 아들에게까지도 이어졌다. 조선왕조가 벼슬을 권했으나 끝까지 사양한 이오는 아들에게도 고려의 유민임을 잊지 말라며 조선의 벼슬을 하지 말 것을 유언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아 아들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자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에 태어났으므로 벼슬을 나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오의 조선 왕조에 대한 저항은 참으로 꼼꼼하고 디테일하고 질기다. 고려동을 세워 담장 안과 밖을 나누고 손자의 벼슬 여부까지도 정해주면서 이오는 조선 왕조에 대한 저항을 관철시켰다.  역시 스토리의 힘이다. 이오가 꼼꼼하고 디테일한 스토리를 남겼으니 고려동이 600년을 넘어 오늘까지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오가 고려 유민임을 자처한 것은 할머니가 고려 공주여서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오의 조부가 전공을 세워 상장군이 되면서 공민왕의 소생인 공주와 결혼하였다는 이야기가 그 근거인데 아직사료로 확인된 내용은 아니다. 


어쨌든 이오의 끈질기고 디테일한 저항은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재령이씨라고 하면'성품이 꼬장꼬장하고 불의와 타협 않으며 자기 소신이 강하다'는 평이 있다. 이오의 유언을 실천하면서 형성된 집안의 성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오가 죽은 후에도 고려동은 그 맥이 이어져왔다. 장내마을에 30호 가량의 후손들이 살고 있고 재령이씨 중 이오의 자손이 4만명이라고 한다. 



고려동은 지금도 경계가 분명한 8,842평방미터의 면적에 후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1983년에는 고려동 유적지란 명칭으로 경상남도 기념물 56호로 지정되었다. 6.25 전쟁 때 많이 소실되어 대부분의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다. 


고려동 앞의 백일홍(자미화)


600년 전 이오가 이 백일홍을 보고 고려동의 터를 잡았다. 그 백일홍은 고려동 바로 옆에 자미단으로 남아있다. 전해 내려오는 고려동 이야기와 지금 남은 고려동 모습의 씽크로율은 놀라울 정도다. 그래서 고려동 이야기가 더 큰 힘을 얻는 것이다.  


건물과 꽃들 하나하나에 600년의 스토리를 머금고 있는 고려동은 찬찬히 음미하며 볼만하다.


* 이 글은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함안팸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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