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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소설

3편 육체의 탄생

커서 2014. 10. 6.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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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났다. 나를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 충분한 수면을 끝내고 일어났을 때의 그 기분이었다. 천정이 보였다. 위 아래가 구분된다는 건 중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컴퓨터가 아니라 육체 속에 있다.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이 지면과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목 근육에 진한 떨림이 느껴졌다. 오른쪽 팔꿈치에 기댄 채 왼팔을 밀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커서님" 


자영의 목소리였다. 구분은 되었지만 컴퓨터 속에서 듣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녹음기에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의 그런 낳설음이랄까? 성대를 한 번 울린 후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와 바로 듣는 목소리처럼 고막을 때리는 소리와 뇌가 바로 인식하는 소리에도 그런 차이가 있었다. 


"아직 몸을 쓰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정신과 육체가 이제 만났는데 서로 적응할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세요" 


대학교 1학년 때 필름이 끊기는 경험을 처음해봤다. 학교축제 때 대낮부터 친구들과 술을 먹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강의실 의자에 혼자 누워있는 것이다. 마치 머리 속을 칼로 베어낸 것처럼 몇 시간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 경험이 너무 신기했다. 지금 딱 그 느낌이다. 몇 시간 전까지 병실에 누워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낯선 공간에 누워있다.  


"민다영씨?"


다시 태어나서 처음 내본 목소리였다. 혀가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커서님. 민자영입니다."


자영은 컴퓨터 속에서 보던 것보단 훨씬 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두 번째 만남이라 친숙해서 그런 걸까? 컴퓨터 속에서 나와서 육체를 가진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자신이 만든 결과물이 드디어 완성된 걸 보고 기쁨도 느꼈을 것이다. 자영에 대한 나의 반응도 처음과는 달랐다. 자영의 목소리가 만든 진동과 파장이 고막만 아니라 온 몸의 세포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의식만 존재하는 경험을 했던 내게 외부의 자극에 육체와 의식이 같이 반응하는 것은 첫경험이었다. 


"불편한 덴 없으시죠?"


2065년 죽기 직전 나는 병원 침대에 있었다. 그땐 몸을 가누기도 힘든 97세 노인이었다. 일어나려면 부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색한 느낌은 있지만 가뿐히 일어났다. 항상 말라있던 손엔 촉촉한 습기가 느껴졌다. 침을 삼켰다. 입안에 맑은 침이 느껴졌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날 구속했던 허리와 관절의 통증은 사라졌다.


"커서님의 육체는 30대 초반입니다. 좀 더 젊으면 좋겠지만 20대의 몸은 부활하기엔 생리학적으로 너무 왕성하죠. 정신이 기거하기엔 육체적으로 안정되고 아직 노화가 덜 진행된 30대가 좋습니다."


일어나고 싶어졌다. 침대에서 다리를 내리자 자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어지러움증이 느껴졌다. 침대에 내려서자 주체하지 못한 몸이 자영에게 쏠렸다. 자영의 팔이 내 등 뒤를 감싸 안았다. 목을 둘러 자영의 왼쪽 어깨를 잡았다. 왼쪽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밀어 올렸다. 어느 정도 몸이 지탱하자 자영이 등 뒤를 감싸 안았던 팔에 힘을 빼고 등에 살짝 올려놓았다. 자영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화장품은 아니고 비누나 가벼운 로션이었다.


"거울을 보여드릴까요?"


그 말을 하자 앞의 벽면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전면 거울로 바뀌었다. 80년 넘게 썼던 안경을 쓰지 않아 약간 낯설었지만 거울 속에 있는 건 분명 나였다. 깊게 패였던 주름은 사라지고 매끄러운 피부가 얼굴을 덮고 있었다. 어렸을 때 동네 누나들이 여자보다 더 찰랑거린다며 부러워하던 생머리가 윤기를 내고 있었다. 70년 전 내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 손등을 다쳐 꿰맨적 있죠. 지금 어떤지 한번 보세요."


초등학교 때 유리에 찔려 오른쪽 손등을 크게 다친적이 있었다. 엄지에서 찢어진 흉터는 손등 검지 아래까지 그어졌다. 그 손등을 보여주기 싫어 여자들 앞에 있을 때면 오른손을 바닥으로 향하곤 했다. 항상 신경쓰이던 흉터였는데 그게 손등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난 젊어진 것만이 아니었다. 새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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