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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의 책

 

 

 

김석준이라고 하면 아마 선뜻 얼굴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 말을 듣는 사람이 부산사람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김석준은 부산시장에 두 번, 국회의원에 한 번 출마한 부산의 대표적 진보 정치인이다. 출마 횟수가 많아서 그를 부산진보의 대표라고 하는 건 아니다. 김석준이 세 번의 선거에서 상당한 득표력을 보여주었고 진보정당이 부산에서 기반을 잡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특히 2002년 지방선거에서 김석준의 활약은 부산을 넘어 진보정당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3자 대결 구도 속에서도 김석준은 16.8%를 얻었는데 이는 당시 민주노동당 후보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이었다. 김석준의 기여 덕분에 전국득표 5%를 넘은 민주노동당은 대통령선거 3자 토론회에서 낄 수 있었고 권영길 후보의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란 대박멘트도 건질 수 있었다. 이런 연쇄작용으로 인지도를 한껏 높인 민주노동당은 그 다음해 벌어진 총선에서 10석을 얻어 제 3당이 되었다.

 

부산 진보의 얼굴같은 정치인이지만 김석준은 투쟁적이기보다 온화하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다. 이런 평가는 이미지가 아닌 실상이다. 실제로 김석준은 진보의 투쟁에만 매몰되지 않고 대중적 신뢰의 기반도 지켜왔다.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서 김석준은 소속정당 진보신당의 단일화 불참 방침에도 불구하고 김정길 후보와 단일화에 나서 야권 지지자들의 열망에 부응했다. 당시 김석준 교수는 "진보신당에서 당론에서 어긋난다고 해서 징계하라는 말도 들린다."며 "징계 당하지 않으려면 김정길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는 말로 단일화에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김석준은 현직 교수다. 그래서 간혹 폴리페서란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이런 공격이 잘 먹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아는 폴리페서는 당선이나 자리를 보장받고 정치에 들어가는데 김석준은 자신의 자리가 아닌 진보진영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교수들은 정치기간이 끝나면 학교로 도망치듯 돌아가지만 김석준은 지속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그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것도 폴리페서들과는 구분되는 점이다.

 

김석준은 진보진영의 정치적 기대에 부응하면서도 교수로서의 책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김석준은 비례대표 포함해 네 차례 공직 선거에 출마하면서 단 한 번도 수업을 빼먹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도 믿기 힘든데 그보다 더 놀라운 에피소드도 있다. 김석준은 선거 중에 같은 당 당원으로서 자원봉사를 하는 제자에게 전화를 걸어 "중간고사 레포트 안 내냐?”고 물은 적도 있다. 이런 거짓말 같은 사실은 김석준의 아래와 같은 자세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옛날 병서에 보면 성을 지키는 사람보다 성을 공격하는 사람이 병력이나 화력이 3배 이상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세상을 지키려는 사람들보다 최소한 세 배 이상 숫자가 많거나 세 배 이상 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대학원 다닐 때에도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보다 세 배는 더 열심히 해야 된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김석준이 정치참여와 교직을 병행하는 것에 비판받을만한 건 없는 듯 하다. 그가 자신의 영달을 위한 정치참여를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서적인 의문이 남긴한다. 왜 3배씩이나 힘들면서 별 소득도 없는 이 일을 김석준은 무려 20년 가까이 하고 있는 걸까? 김석준은 자신의 정치참여를 이렇게 설명한다.

 

“끝까지 사양을 하지 못한 것은 대학 시절 모든 것을 버리고 감옥으로 끌려가던 벗들에 대한 빚진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저항하고 당당하게 감옥으로 끌려가던 친구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온전히 대학을 졸업하였다는 미안함과 빚진 마음이 언제나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석준은 우수학생이었다. 서울대 출신에 부산대학교 최연소 교수 타이틀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김석준은 공부만 하는 범생이는 아니었다. 영화 친구들의 주인공이 자라던 우암·감만동의 거친 환경에서 초등학교 때 전교 6등의 주먹서열을 기록하기도 했고 고등학교 땐 학년대표로 뽑힐 정도로 운동도 잘했다. 소위 껄렁껄렁한 학생들과 운동도 하며 어울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런 김석준을 어떤 후배는 주먹서클 회원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운동 잘하고 싸움도 지지 않는데 공부까지 너무 잘하는 김석준은 그 또래의 소영웅이었다.

 

70년대 시국에서 대학을 간 그 또래의 소영웅이 과연 운동권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김석준은 서울대 입학하자마자 곧 운동권이 되었고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김석준은 무사히 졸업하고 대학교수까지 되었다. 불운과 행운이 겹쳐 일어난 일이었다. 무리한 학생운동의 결과 김석준은 3학년 때 심한 결핵을 앓아 적극적 참여가 어려웠다. 이후 학문을 통해 운동의 지평을 넓혀보자는 의도에서 운동권 일부와 함께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마침 시행된 졸업종원제로 교수인력이 부족해져 졸업 후 바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김석준처럼 70년대와 80년대 학창시절을 무사히 보낸 이들 중에 부채의식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김석준의 부채의식은 남달랐을 것 같다. 김석준은 친구들로부터 '석준이는 뭔가 달라'라는 선망의 시선을 받은 소영웅이었다. 그런 시선은 김석준의 부채의식을 더 강화시켜 '그만하면 됐다' 선에서 정치참여를 끝낼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주인공은 교실을 도망치듯 떠나갔지만 김석준은 돈 버느라, 교수라서 라는 등의 이유로 모두 떠난 우리들의 교실에 남아 자신의 부채감을 갚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빚진 영웅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최근 김석준이 교육감 출마를 선언했다. 부산 진보의 대표 정치인으로 알려진 김석준의 이 선언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김석준은 왜 시장에서 교육감으로 진로를 변경했을까? 여기엔 어떤 일관성이 있는 걸까? 교육감은 선출직이면서 전문직이랄 수 있는데 과연 김석준은 그 자격이 될까? 이런 의문 때문에 김석준을 만났다. 왜 교육감으로 바꾸었냐는 첫 질문에 김석준은 짧고 간명하게 대답했다.

 

"교육감도 선출직이죠. 정당활동은 아니지만 시민들에게 평가받습니다. 정치판에 있다 왜 여기 오냐 하는데 저는 부전공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석준의 교육감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 부전공을 했다지만 그의 직업상 전공은 교육이다. 김석준은 부산대학교 사범대 사회학과 교수이다. 1983년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길러낸 수천명의 제자들이 지금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석준은 이런 제자들과의 소통도 지속적으로 깊이있게 하고 있다. 선생님이 된 제자들의 한국교육현실에 대한 의견들이 그의 논문에 실리기도 했다.

 

김석준은 자격만 있는 게 아니라 교육감으로서의 차별적 경쟁력도 있다. 김석준은 부산에 대해 연구해 왔고 부산학의 필요성을 역설한 자칭 타칭 부산학박사다. 2000년 한 학술세미나에서 김석준이 부산학 연구센터를 제안했는데 실제로 그 다음해 부산시 도시혁신연구위원회 내에 부산학 분과가, 2002년엔 신라대학교에 부산학 연구센터가 만들어졌다. 그의 선구적 주장에 힙입어 부산학의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교육감이 아니라 부산의 교육감이라는 점에서 김석준의 부산학적 지식과 지혜는 더욱 돋보인다. 참고적으로 그가 말하는 부산학은 이렇다.

 

 

김석준 서재의 부산학 도서들.

 

 

"부산학적 상상력은 부산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고 또 앞으로 살아갈 부산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자연적 요인들의 실태를 정확하게 포착해 냄으로써 부산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능력/노력이다. 이러한 부산학적 상상력은 편협한 전공 영역의 벽을 뛰어 넘어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학문적 실천을 의미하며 혜택받는 소수보다는 소외되고 배제된 다수의 입장에서 지역 문제를 파악하고 그 해결 방안을 추구하는 사회적 실천에 맞닿아 있다."

 

김석준은 어떤 교육감이 될까? 거창한 주장보다 실질적 고민을 들여다 보는 게 그의 정책을 파악하는데 더 유용할 것 같다. 다른 교육감 후보들은 몰라도 김석준은 이런 부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선거들의 인터뷰 등을 통한 검증에서 그의 자녀교육과 자신이 자란 교육환경에 대한 얘기가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석준은 엄한 집에서 자랐다. 기대가 컸던 부모님은 성적이 떨어지면 매도 들었고 김석준은 부모님의 그런 기대에 맞춰 공부했다. 이런 부모님의 영향으로 김석준도 처음엔 아이한테 엄했고 매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를 이길 수 없었다. 이때부터 김석준은 아이를 기대의 틀에 넣기보다 변화를 도와주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에 만족했다고 한다. 부모님의 긍정적인 매와 아이에겐 부정적이었던 자신의 매, 둘 다 기억하는 김석준은 그 둘 사이에서 조화를 찾으려 할 것으로 보인다.

 

김석준은 맞벌이 부부다. 둘째와 셋째부터는 거의 챙겨주지 못해 애들은 숙제뿐 아니라 모든 걸 자신들이 알아서 해야 했다고 한다. 애들을 키워준 건 반이 학원이었다. 관심을 많이 주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이들은 돌아가며 속을 썪였고 다행히 어느 순간부터는 제 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김석준은 맞벌이 부부의 육아와 교육의 고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가 교육감이 된다면 맞벌이 부부의 교육에 대한 실효성 있는 정책이 나올듯 하다.

 

김석준은 학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다. 그도그럴 것이 앞서 말한 것처럼 학원이 없었다면 김석준은 아이들을 키울 수 없었다. 김석준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압력을 그대로 견디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며 "비인간적 경쟁 풍토는 지양해야 하지만 우리 애를 그 대열에서 떼 내어 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을 것"이라고 한다. 김석준이 교육감이 되면 학원정책에 대해 현실적 조치가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선생님 수업시간에 대통령도 못 들어온다' 그런 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님들이 교장이나 교감의 명령에 꼼짝 못하는 분위기이다. 김석준을 만난 자리에서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니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댕길 때 수학선생님이 대단한 게 수업 중에 교감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이 양반이 분필깍이를 집어던져버리더라구요. 실제 법상으론 강의 중에 교감이나 교장이 수업을 볼 수 있긴 하거든요. 그래서 선생님 진짜 짱이구나 생각했죠. 그때는 그런 게 가능했던 거죠. 교사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요. 지금은 그게 안되죠. 선생님들의 교권이 쪼그라들어 학생들의 외벽 역할도 버거워 하죠."

 

김석준은 선생님의 공간이 좁아지면서 학생들이 더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교실은 아이들을 돌보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선생님도 평가와 징계의 압박을 받다 보니 아이들을 룰에 맞춰 지도하고 그 이상의 돌봄을 꺼려하면서 교실이란 공간이 아이들을 규격에 맞게 짤라내는 공간이 되버리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를 했다.

 

"부산사람들이 부산에 있어서 안된다는 열패감, 이런 걸 극복하고 부산이 살기 좋은 도시고 잘 사는 도시라는 자부심을 길러야 합니다. 교육자치가 되면 법적으로는 지자체에서도 교과서를 따로 만들 수 있는데 입시제도 때문에 채택이 쉽진 않겠지만 된다면 제한된 시간이라도  한 학기 몇시간 정도 부산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서 부산에 대한 역사를 알고, 장점과 단점을 익히고, 부산을 기반으로 해서 커나가고, 떠나더라도 부산에 애정을 가지는 시민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김석준이 만남 말미에 해준 말이다. 그의 말을 들으니 우리 아이가 부산교과서를 펼치는 모습이 기대되었다. 아이가 배우는 수학과 과학은 몰라도 부산은 내가 잘 얘기해줄 수 있다. 내가 살아왔던 부산의 동네들과 당시의 모습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 아이와 더 많은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와 나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부산학교과서 생각해보니 부산사람에게 꼭 필요한 교과서인 것 같다.

 

 

김석준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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