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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0년 작성된 글입니다.


 

10년 전인 2003년 2월 18일 오전이었습니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지하철에 불에 탈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식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연이어 날아든 소식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때까지도 재미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묘한 흥분이 몰려 왔습니다." 류호정씨는 지니고 있던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1080호의 3호차에 있던 승객들은 밖으로 나가야할 이유도, 앞으로 닥쳐올 대참사도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참사 1주기 추모 사진집 중에서

 

 

 

 

화재는 한 남성의 방화로 시작되었습니다. 승객들이 생생히 기억하는 참사의 시작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막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엔 이 남성의 방화 시도를 승객들이 제지했습니다. 그러나 재차 이어진 시도는 끝내 지하철엔 불이 붙고 말았습니다.

 

 

클릭하면 좀 더 큰 이미지를 볼수 있습니다

 

 

9시 53분 시작된 불은 57분 경 중앙로역에 진입한 1080호 열차에 불로 옮겨붙었고 지하역사는 순식간에 불길과 연기에 뒤덮여 탈출조차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cctv로 확인한 결과 이미 불이 난 직후인 54분께 역 안은 짙은 연기로 가득 차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불이난지 10분이 안된 10시 1분 구조대원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심한 연기와 유독가스 때문에 지하역사엔 진입조차할 수 없었습니다. 역내 구조활동은 역이 모두 전소된 3시간 후인 오후 1시에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날 사고로 이날 무려 192명이 지하철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희생당했습니다. 대구지하철화재참사는 세계 2대 지하참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사고를 파악하면서 나온 사고내용들도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방화범은 신병을 비관한 50대의 지체장애자였습니다. 그는 우울증을 앓아왔고 자살도 몇차례 시도한 전력도 있었습니다. 사회적 소외자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이 이 사회에 테러 이상으로 치명타를 줄 수 있다는 점에 국민들은 경악했습니다.

 

 

 

불이난 1079호 전동차보다 맞은편에서 불이 옮겨붙은 1080호 전동차에서 대부분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것도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사령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고 사고를 대응하는 과정에서 기관사 1인의 판단에 의존하면서 상황을 정확히 파악 못했고 그때문에 판단의 시기도 놓쳤기 때문입니다.

 

 

 

 

통곡의 문으로 불렸던 방화셔터가 승객들의 탈출을 막은 것은 참혹한 장면이었습니다. 평소 지하철 이용자 대다수가 입출구로 이용하는 이곳이 방화셔터로 닫힘으로서 이쪽으로 대피해온 많은 승객들이 막혀 되돌아가다 질식사했습니다. 방화셔터 앞에서 문을 손톱으로 긁다 숨진 희생자도 있었습니다. 주된 통로에 방화셔터가 설치된 것도 문제였고 희생자들이 발버둥 치는 상황에서 방화셔터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이었습니다.

 

 

 

 

사고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과 노약자였였습니다. 허술하게 관리되는 대중교통의 위험이 결국 우리 사회 약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경악케 한 것은 불쏘시개처럼 탔던 지하철의 내장재였습니다. 지하철에 불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방염처리되어야할 내장재가 그 역할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유독가스 배출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사결과 내장재 공급업체에서 규정을 어긴 불량자재를 쓴 것이 밝혀졌습니다. 

 

 

 

 

내장재는 업체의 불량자재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유럽·홍콩·미국 등에선 전동차 소재를 불연재 혹은 최상급 난연재를 쓰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반해 국내에서 이전까지 내장재 규격에 대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1년 뒤 홍콩에서 비슷한 방화사건이 있었지만 불연재의 규정 덕분에 부상자만 14명 발생했을 뿐이었습니다. 

 

전동차 제작 업체인 로템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대구지하철에 납품된 한진중공업 차량의 내장재는 허용규격 내에 있더라도 그 가연성 정도가 허용규격 중 가장 낮은 '자기소화성 단계였다고 합니다. 해당 열차가 규격 내의 부품을 썼더라도 화재를 막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대구지하철참사를 조사하러 온 일본소방청의 한 관계자는 “일본 지하철 의자는 잘 타지 않는데, 대구지하철은 형체까지 없어진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수출용 전동차와 국내용 전동차가 차별 제작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도 국민을 분노케 하였습니다. (주)로템이 홍콩과 인도에 수출하는 전동차 차량은 국내보다 성능이 월등한 불연재와 난연재를 사용하여 납품하고 있었습니다. 성능의 차이는 가격의 차이로 나타났는데 외국 수출용 전동차 차량 가격이 1량당 17억이었던 반면 대구지하철에 납품한 차량의 가격은 세배나 더 낮은 5억2천만원이었습니다. 대구지하철 차량 가격으로는 승객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내장재가 애초 불가능했다고 볼만한 대목입니다.

 

 

 

 

 

전동차에 승무원이 기관사 한 명뿐이었다는 것도 통탄했던 부분입니다. 만약 1079호 전동차에 승무원이 한 명 더 있었다면 기관사는 불을 끄고 뒤쪽 승무원은 사령에 연락을 취해 1080호의 진입을 막았을 겁니다. 1080호 전동차도 기관사가 있던 앞쪽의 문만 열리고 뒤쪽은 닺혔는데 만약 뒤쪽에 승무원이 있었다면 출입문의 걔폐를 확인하고 긴급조치도 취하면서 많은 승객들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사고도 참혹했지만 대구지하철참사가 우리를 더 통렬한 슬픔에 빠지게 한 건 불지옥에서 걸려온 희생자들 휴대전화였습니다.

 

 

 

 

“지금 어떻게 된 건가요? 제 옆사람 지금 숨넘어 갔어요. 빨리 좀 ….(‘콜록콜록’) 빨리!”


“(30대 여성 다급한 목소리로) 불났습니다. (‘웩웩’하는 구토소리) 앞이 안 보입니다. (‘콜록콜록’, ‘꺄악’하는 주변 승객들의 기침, 비명소리)”


“(20대 여성 한동안 말 못 하다가) 악! 흑흑흑 …”(59분43초·마지막 신고전화)

 

 

가족에게 걸려오 희생자들의 전화는 가족들의 가슴을 찢어놓았습니다.

 

“엄마, 숨을 못쉬겠어.(…) 엄마, 사랑해 ….”

 

"아빠, 구해주세요. 문이 안 열려요.”(고등학생 딸)


“부디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세요.”(막내 아들)


“오빠, 영원히 사랑해 ….”(갓 결혼한 20대 여성)

 

 

 

 

대구에 출장 온 예비신랑은 사고 7분 전 예비신부에게 이런 문자를 남겼습니다. "잘 잤어요? 여긴(대구) 날씨 맑음^^, 오늘 하루 보고 싶어도 쬐금만 참아요"

 

 

 

 

 

대구지하철참사의 희생자들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그겁니다. 우리와 우리 가족의 안전은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챙기고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전을 권력과 자본에만 맡기면  이런 사고는 또 다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사고 후 정부는 지하철 차량 내장재를 전부 교체했습니다. 지하역사의 안전기준도 강화했습니다. 201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참사 10주년에 192명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들의 희생으로 안전해진 지하철을 한번 돌아봤으면 합니다. 대구지하철화재참사 다시는 있어서는 안되는 사고입니다. 그리고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참사입니다.

 

 

 

* 사진은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 대책위원회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신문 스크랩은 동아일보 2003년 2월 19일자부터 23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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