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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원도심은 일본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곳이다. 

 

 

 

 

부산 원도심엔 일본이 무역을 위해 설치한 초량왜관이 있었다.

 

 

 

부산항은 일제시대 매립과 착평공사를 통해 확대되었다.

 

 

 

 

부산의 원도심은 과거 200년 동안 조선이 일본과 교류하는 창구였다.

 

 

 

 

영선고개는 그 교류창구의 마지막 통로였다. 지금의 상해거리에서 옛 초량왜관이 있었던 용두산 공원 인근까지 지하철 두 정거장이 안되는 이 길을 통해 왜관으로 물자와 식량이 들어갔다고 한다.

 

* 영선이라는 말이 건물을 정비수리한다는 의미의 일본식 한자인데 일본이 왜관을 수리할 때 이 길로 물자를 가지고 갔다고 해서 영선고개라고 불렸다는 말도 있다. 

 

 

 

 

영선고개가 시작하는 홍성방 앞이다. 홍성방은 만두로 유명한 중국집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초량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조선인 부락 무단출입을 막기 위해 동래부에서 설치한 군관들의 기찰(넌지시 살핌)터가 있었다.

 

 

 

 

이 곳은 그 후 상해거리로 바뀌었다.  1884년 청나라 영사관이 현재 화교학교 자리에 개관한 후 청나라 사람들의 주거지를 겸한 점포가 밀집 형성돼기 시작했다. 당시엔 이곳을 '청관거리'라고 불렸는데 부산시가 상하이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상해거리'로 부르게 되었다.

 

 

 

 

과거 청나라 영사관이 있었던 화교학교이다.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화교중학교도 나온다.

 

 

 

 

중일전쟁 후 화교들은 대부분 떠났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엔 미군들의 유흥지로 자리잡으면서 텍사스촌으로 불렸다. 90년대에는 러시아 선원과 보따리 장수들이 많이 찾으면서 영어 간판이 러시아 간판으로 싹 바뀌었다.

 

 

 

 

초량상해거리에서 길을 건너면 봉래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여기에 초량객사가 있었다. 일본인을 감시하는 기찰터가 이  부근인 홍성방 앞에 있었던 것도 초량객사 때문인듯 하다. 객사란 역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 두고 지방관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숙배를 올리던 곳으로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된 곳이다. 일본사신들도 부산에 도착하면 초량객사에서 역대 국왕의 전패에 숙배를 올리고 예물을 증정하는 등 숙배식의 모든 절차를 행했다.

 

초량객사터에는 1895년 사립 개성학교가 세워졌다가 그 후 부산공립보통학교에서 현재는 봉래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봉래초등학교를 나오면 저 멀리 활시위같은 곡선을 뽐내는 코모도 호텔이 보인다.

 

 

 

 

한때 부산의 중심이었던 부산의 원도심은 지금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낙후된 지역이 되어버렸다. 

 

 

 

 

1979년 세워진 코모도호텔은 호주 출신 건축 디자이너 조지 프루의 작품이다. 조선왕궁을 재현한 건축물로 활처럼 휘어 놓은 디자인에 각 층마다 화려한 장식의 단청으로 수놓아져 있다. 실내는 한국민화에서 소재를 본떠 부조한 벽을 비롯해 연꽃무늬의 천정 및 바닥으로 외국인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왼쪽 옆의 5층 멘션은 1984년 준공된 100세대의 부원멘션이다. 

 

 

 

 

오른쪽 석기시대는 오향장육이 유명한 맛집이라고 한다. 저렴하고 맛있다는 블로거들의 평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구청과 메리놀병원 아래를 논치시장길이라고 하는데 이길로 중구청과 메리놀병원 직원들이 출퇴근을 했고, 경찰서, 신문사, 은행, 호텔, 세관 등이 근처에 밀집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30년 전에도 달세가 50만원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반도 안되는 20만원이다.

 

 

 

 

중구청과 메리놀병원 올라가는 길이다. 메리놀병원은1950년 메리놀수녀회에서 설립했다.

 

 

 

 

아직도 우물이 있다. 물은 있었는데 식수는 아닌듯했다.

 

 

 

 

중구청 바로 아래 남성여고에서 바라본 코모도호텔이다.

 

 

 

 

남성여고에서 바라본 부산항.

 

 

 

 

남성여고 교정에서 본 용두산 공원. 남성여고에선 부산 원도심을 여러 방면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용두산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자. 용두산은 해발 49m의 구릉으로 그 형태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용두산"이라 하였다. 옛날 부산시청자리엔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용미산"이 있었다. 용두산이라는 명칭은 1899년 일본인 승려들이 산 정상에 신사를 크게 지어 그 이름을 “용두산신사”라고 칭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확정된 걸로 보인다. 일제시대 당시 남포동으로 달리던 전차가 일본신을 모신 용두산 신사 앞을 지날 때면 전차 안의 승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용두산을 향해서 큰절을 해야했다고 한다. 1945년 11월 17일 민영석(당시 36세)에 의해 용두산 산사는 불태워졌다.

 

 

 

 

남성여고를 내려오는 길.

 

 

 

 

그 아래에서 본 일본식 절. 

 

 

 

 

남성여고에서 내려와 동광동 인쇄골목 가는 길엔 아주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 상당수는 사람이 안 사는 듯했다.

 

 

 

 

 

이 밑으로 동광동인쇄골목이다. 60년대 초반 형성되어 부산의 경인쇄물량 50%를 소화하고 있다. 각종 인쇄관련 회사와 판매점이 몰려있어 한 곳에서 다양하고 수준 높은 제품을 신속히 인쇄하고 타 지역에 비해 20% 이상 저렴하다고 한다.

 

 

 

 

저 위의 집은 지어진지 60년이 다 된 건물이다. 내가 저 집의 년수를 아는 건 2년 전 포스팅했던 글에 붙은 댓글 덕분이다. 2년 전 동광동  인쇄골목에 관한 글을 썼는데 저 집에 살았던 한 분이 댓글로 설명을 해주셨다.

 

  

 

 

 

이곳은 2년 전과 또 달라졌습니다. 예전에 허름한 버려진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다 허물고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부산에선 원도심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일듯 싶습니다. 그런데 샷시 열쇠 상점 문이 70년대식이라는 건 좀 아이러니하네요.

 

 

 

 

동광동주민센터에서 운영하고 있음는 40계단 문화관입니다. 원도심의 특징은 수많은 계단이랄 수 있는데 40계단 문화관 답게 계단을 예쁘고 재밌게 잘 만들어놨습니다. 

 

 

 

 

40계단 문화관 안에서 코모도호텔이 보이네요.

 

 

 

 

40계단 문화관에서 본 부산항입니다.

 

 

 

 

옛 부산역은 지금의 중앙동 무역회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때 부산역 광장을 새마당이라고 했는데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 새로운 마당이 되었다고 해서 부른 이름입니다.

 

 

 

 

원도심은 계단의 도시입니다. 이건 반달계단.

 

 

 

 

남포동 방향으로 반달계단을 지나 조금 가면 소라계단이 나옵니다. 애들이 특히 좋아하는 계단입니다. 

 

 

 

 

조금 더 가면 드디어 나타나는 40계단.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이 계단 일대에서 미군부대나 원조물자 등 각처에서 흘러나온 구호물자를 팔았다고 합니다. 40계단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유명해진 것은 “40계단 층층대에 기대앉은 나그네…”라는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하면서부터입니다.

 

 

 

 

아코디언 동상 왼쪽의 이용원.

 

 

 

 

 

 

40계단에서 남포동 방향으로 찻길을 건너면 부산의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계림, 양산박 등의 옛날 술집이 나옵니다. 실내는 문화계 관련 포스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낡은 공간을 지켜준 많은 술병과 담배가 고마워지네요. ^^

 

 

이질적인 문화가 스며든 도시의 이야기는 컨텐츠 자원입니다. 부산은 왜관부터 현대까지 그런 스토리가 풍부한 도시입니다. 

 

부산 원도심 걷기는 읽기입니다. 한발한발 무엇이 나올까 설레이는 걷기입니다. 자연에 몸을 던지는 올레길과는 다른 읽는 재미가 있는 걷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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