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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들이 지적하는 문제점을 대중이 모르는 것은 아니다. 디워는 아주 단순한 영화라서 대중도 그 약점과 장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디워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만 의견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연출은 허술하지만 액션은 괜찮다’가 이 영화에 대한 일치된 의견이다.


평가는 어디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갈린다. 영화의 장점에 주목하고 그 장점에 비하면 약점은 참아 낼만한 수준이라는 쪽은 열광하고, 약점이 너무 커서 장점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쪽은 냉소적이다.


나는 장점에 주목한다. 디워가 보여준 액션은 헐리우드 어느 블록버스터에서도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영화의 놀라운 장면에 정신이 빼앗겨 약점은 그렇게 거슬리지 않았다.




거대한 뱀이 차량들을 튕겨내면서 대로를 질주하고 튕겨나간 차들이 도로위에 종아상자처럼 나딩군다. 수백미터 높이의 빌딩을 감아 올라간 이무기가 헬기를 덮썩 물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친다. 익룡이 튕겨낸 표지판에 헬기가 맞아 떨어지고 헬기 위에 익룡이 올라타기도 한다.


관객이 상상하지 못했던 새롭고 역동적인 장면을 선사하면서 영화는 수십분간 관객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애들도 어른도 후반 전투씬이 진행되는 동안 자리를 들썩이지 않고 모두 화면만 응시했다.


평론가들의 디워 리뷰가 실패한 것은 후반 장면의 그 의미와 장점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객이 넋을 잃고 본 그 장면을 단순한 기술적 진전 정도로만 설명했다. 그 장면이 관객에게 어떤 충격과 재미와 의미를 선사할지에 대해 평론가들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디워의 시지 장면에 대해 “미국토스트기의 복제판”이라는 대책없는 비판은 액션씬에 매료된 대중의 분노를 사기에 딱 알맞은 발언이다.


디워와 많이 비교되는 작품으로 트랜스포머가 있다. 트랜스포머도 스토리가 많이 엉성한 작품이다. 헐리우드 기본이 있어 조금 더 세련되기 했지만 둘 다 거기서 거기다. 누군가 디워를 300억 어치 떡볶이라고 했는데 트랜스포머는 1,500억 어치 햄버거 쯤 된다.


그런데도 트랜스포머가 성공했던 것은 영화의 타겟을 맞추고 거기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유쾌한 에피소드로 채운 다음 나머지는 남자들의 로망이라 일컬어지는 로봇의 변신을 쏟아 부었고 이것이 먹혀들어 7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요즘 영화는 이처럼 이야기를 단순화 하거나 별 신경 안쓰고 볼거리나 코드에 매달린다. 이런 경향은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의 성공이후 더 굳어진 느낌이다. 디워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워가 의도한 흥행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이런 류의 헐리우드 영화와 상대평가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트랜스포머와 디워 중 어느 게 더 재밌을까? 나는 디워의 손을 들어준다.


둘의 승패를 가르려면 각자가 보여주려 했던 부분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를 봐야 한다. 두 작품 다 시지에 승부를 건 영화들이다.




트랜스포머의 시지는 현란했다. 그러나 차의 어느 부분이 로봇으로 변했는지 눈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고 그저 ‘변하는갑다’ 하며 볼뿐이었다. 도심에서 벌이는 전투도 마찬가지로 눈을 피곤하게 했고 로봇의 무게감도 느낄 수 없었다. 트랜스포머는 시선의 속도를 배려하지 않음으로써 디워에 비해 긴장감 없는 시지가 되버렸다. 역동성과 긴장감에서 분명 디워가 트랜스포머보다 훨씬 낫다.


트랜스포머가 성공했는데 디워가 성공 못할 이유가 없다. 트랜스포머보다 즐겁고 국산영화로서 뿌듯함까지 안겨주는 이 영화에 대중이 감격해하고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다.


디워에 대한 평론과 예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한 열광을 ‘황빠’에 빗대어 조롱하는데 좀 비겁한 짓이다. 틀린 건 자신들인데 마치 다수의 대중이 오류를 저지르는 것처럼 덮어 씌우고 있다. 이건 “역시 이런 무지한 대중이 열광하는 영화란 거 뻔하잖아” “애국심에서 보는데 나보고 어쩌라구” 식의 평론 실패에 대한 또 다른 변명이다.


심형래감독은 대한민국에서 어떠한 영화도 가능함을 디워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선도적 작업에 열광하는 것이 황빠로 폄하될 일은 아니다. 황빠는 거짓에 대한 인지부조화를 가리키는 말이지 열광적 대중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심빠가 황빠라면 2002년 월드컵의 대중도 황빠라 부를 수 있다. 그건 말이 안된다.


디워를 안좋게 보는 사람 중에는 미국흥행은 어림도 없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 한국흥행은 이미 보장되었으니 미국흥행 여부로 자신의 주장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자꾸 뒤로 후퇴시키면서 버티는 황빠의 전형적 행태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 행태를 두고 내가 디워에 비판 적인 사람들을 황빠라 덮어씌운다면 다른 디워에 비판적인 사람은 분명 열받을 것이다.


심형래의 성과가 거짓으로 드러났는데도 그의 곁에 남아 있다면 그는 황빠류가 맞다. 그러나 디워라는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서 황빠 운운하는 짓은 하면 안된다. 열광에는 어느 정도 비이성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 비이성적 이면을 들추어 내어 폄하한다면 그런 비판에 온전할 열광은 없다.


지금 평론가가 해야할 일은 대중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빗나간 평론을 수습하는 일이다. 그런데 대중이 왜 열광하는지를 분석해야할 평론가가 대중에게 투덜거려서 될 일인가. 그건 평론에 있어 ‘대중의 영화보기’엔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는 글은 평론이 아니라 선언일뿐이다. 어떤 분의 글은 선언이 아니라 선전포고로까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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