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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출신 대권주자들이 풍년이다. 서울시장 후보 양보로 안철수 원장이 단박에 대선지지율 1위를 넘나들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비슷한 장외 유망주인 조국 교수도 덩달아 주목받고있다. 문재인 변호사는 이미 야권 대선후보 지지율 1위에 올라선 바 있다. 여기에 지난 지방선거 부산에서 야권으로는 사상 가장 많은 44%의 득표를 한 김정길 전 장관이 사실상의 대권출마선언을 한 상태고 진보진영의 스타 정치인 노회찬도 내년 총대선 선택을 눈여겨볼만한 부산 출신 정치인이다.

부산출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유년·학창시절 부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부친이 지금도 부산 범천동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안철수 원장은 부산고를 졸업했다. 구덕산에서 놀며 자랐다는 조국 교수는 혜광고를, 어린 시절 영도 성신성당의 수녀님들을 천사처럼 기억하는 문재인 변호사는 경남고를, 구봉산을 오르내리며 놀았다는 노회찬 전 대표는 경남중을, 부산의 대표적 야권 정치인으로 이름 높은 김정길 전 장관은 동아고를 졸업했다.





유력한 대권 주자들은 부산에서 어떤 유년학창시절을 새겼을까? 그들은 부산이란 같은 공간에서 얼마나 스치고 겹쳤을까? 야권 5인방의 유년시절을 살펴봤다. 


안철수 (1963년 생 동성초등, 중앙중학교, 부산고등학교)

안철수의 아버지는 안철수가 태어나고 1년 뒤인 1963년 부산의 신암 동네에서 병원을 열었다. 당시 신암은 피난민이 모여살던 판자촌이었다고 한다. 안철수는 어린 시절 학교에 가기 싫을 정도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얼굴이 유난히 흰데다 운동과 공부도 별볼일 없어 놀림감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 어린시절 동물을 친구삼아 놀기 좋아했다. 한번은 메추리를 부화시켜보겠다고 품고 잔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품은 메추리알이 온전할리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이불은 온통 메추리 껍질과 노란 액체로 범벅이 되었다. 조금 더 자라면서 안철수는모형을 조립하거나 집안의 기계들을 분해조립하는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기계들을 분해하다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내성적 성격이라 말썽을 피진 않은 대신 안철수의 호기심이 집안 물건을 고장내는 잔잔한 사고는 가끔 일으킨듯 하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청소년 시절 저는 지독히 내성적인 학생이라 남 앞에 서거나 남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공부 대신 소설책을 읽다가 어머니께 가끔 야단도 맞았습니다. 만약 다시 청소년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보다 운동을 많이 하고 싶어요.
안철수가 회고하는 어린 시절


안철수는 스스로 활자중독증이라 할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책의 페이지 저자 년월일까지 다 읽어야 직성이 풀렸는데 결국 학교 도서관의 책을 다 읽어버렸다. 도서관 사서가 매일 몇 권씩 대출과 반납을 하는 안철수가 장난을 치는줄 알고 대출을 거부할 정도였다. 책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공부는 뒷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중간 정도 성적을 유지하다가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안철수는 원래 의사보다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선생님과 진학면담을 하는 중 말썽을 피워도 웃어주시던 어머니와 가난한 동네에서 병원을 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안철수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로했다. 선생님도 흡족해하고 가족들도 기뻐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따라 늦게 일어나 학교 가는 시간이 몹시 늦어 택시를 타야만 했다.
어머니께서는 큰길까지 따라 나오셔서 택시를 잡아 주시고는 나한테 "잘 다녀오세요" 라고 인사를 하셨다.
나도 어머니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거울로 나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형수님이신가?"
 
"아니오, 제 어머니세요."
 
"내가 잘못 들었나보네. 어머니께서 분명히 '잘 다녀오세요'라고 한 것 같은데......"
 
"네, 맞아요."
 
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택시 기사는 그런 나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택시 기사는 한참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학교로 달렸다. 학교에 거의 다 왔을 때 택시 기사는 "학생은 참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네. 나중에라도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잘 모셔야 하네." 하고 말했다.
사실 나는 그때 택시 기사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어머니께서 우리 자식들한테 높임말을 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능을 키워준 나의 어머니 (안철수 편)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안철수는 늘 혼자였다. 선후배들이 어울릴 때 안철수는 책과 영화를 봤다. 동기들 대부분은 이런 안철수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안철수의 대인관계가 변한 건 본과 3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다. 본과의 공부는 혹독했다. 그 혹독한 1년을 마치고 부산에서 방학을 보낸 후 학교로 돌아왔는데 다시 힘든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그만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울고말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다음날 즉시 올라와 안철수를 부산에 데려갔고 개강까지 남은 1주일 동안 안철수는 낚시를 하며 쉬었다. 그후 안철수는 친구를 사귀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의료봉사활동 동아리에 가입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술도 마시고 수다도 떨었다. 술에 잘 취하지 않았지만 일부러 취하려고 노력도 했다. 안철수는 이때 사람들에게 긴장을 풀고 마음을 여는 법을 배웠다. 안철수는 사람을 가장 늦게 배웠다. 하지만 그때문에 가장 잘 배웠을지 모르겠다.


조국(65년 생 구덕초등학교, 혜광고등학교)





조국 교수는 65년 부산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국은 서울대법대 최연소 입학생으로 유명한데 이렇게 된 건 구덕산 아래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사라지자 조국이 부모님을 졸라 조기입학했기 때문이다. 조국은 학창시절 줄곧 모범생으로 1등을 놓친 적이 별로 없었다. 조국 교수는 그게 자주 불리고 주목 받았던 독특한 이름 덕도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82년 대학에 들어간 조국은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사진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는데 투사형은 아니었다고 한다. 조국의 잘생긴 외모는 이대 등 다른 여학교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는데 그때문에 선배가 조국의 외모가 금방 눈에 띄어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뒤에 있으라고 했단다. 그래서 조국이 주로 맡았던 일은 군사독재를 비판하는 글을 쓰고 자료를 모으는 일이었다.

고문치사로 숨진 박종철 열사는 조국 교수의 대학교 고등학교 후배다. 정치권에는 조국 교수의 대학 동기로 원희룡과 나경원이 있다. 원희룡은 운동권 출신이다. 나경원은 사회문제에 관심없는 모범생이었는데 노트필기를 잘해서 조국 교수가 가끔 빌려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노트 빌릴 때 누구 가슴이 더 떨렸을지 궁금하다.  


문재인(1953년 생 남항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

문재인의 부모님은 흥남철수 때 고향을 떠나 거제포로수용소에 도착했다. 문재인은 1953년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문재인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가족은 부산 영도로 이사왔다. 문재인은 어렸을 때 사탕이나 과일을 쥐어주는 수녀님이 천사같아 보였다고 한다. 그런 고마움 때문인지 문재인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영세를 받았다. 결혼식도 영도의 성신성당에서 했다. 전쟁 후라 가난했지만 문재인 집은 좀 더 가난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1/3에 포함돼 학교에서 쫓겨난 적이 부지기수였는데 6학년 때까는 집에 월사금 받으러 간다고 나왔다 만화방 앞에서 들켜 선생님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문재인은 초등학교 때 키도 작고 몸도 약하고 내성적이어서 선생님 관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성적표도 그저 그랬는데 6학년 때 중학교 입학시험 치면서 자신이 공부 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한 경남중학교는 대체로 부유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문재인은 그 친구들에게 주눅들어 잘 어울리지 못했다. 중학생 문재인에겐 도서관의 책들이 가장 큰 낙이었다. 닥치는대로 읽었는데 2학년 때는 3개월 가냥 도서관 문닫을 때 의자정리까지 도와준 다음 집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문재인은 이름 때문에 문제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고3 땐 실제로 문제아로 찍혔다. 학교 뒷산에서 술마시고 담배피우다 유기정학을 받은 것이다. 결국 문재인은 입시 공부를 등한시한 대가로 대학 입시에 실패했고 재수 끝에 후기였던 경희대 법대에 입학했다.

문재인은 대학시절 학생운동 전통이 약한 경희대학교의 시위를 주도했다. 스스로 조직하고 깨치다보니 문재인의 운동권 경력은 3학년 재단퇴진 농성 때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 문재인은 사법고시 1차를 합격한 상태였다. 동기중에선 유일하다시피했다. 2차 시험을 핑계대고 빠질만도 한데 문재인은 선언문을 읽고 그것도 모자라시위 대열 맨 앞에 서기까지 했다. 그날 문재인은 페퍼포그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스를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문재인은 제적뒤 복한한 5년 뒤에도 시위와 사법시험을 병행해야할 처지에 놓였다. 문재인은 시험을 핑계대지 않고 학내 시위에 빠짐없이 참여했고 그런 상태로 2차 시험을 친 후 그속되었다. 문재인은 사법시험 합격을 교도소에서 들어야 했다.


 


75년 시위에서 제적당한 문재인은 곧바로 입대했다. 문재인은 군대에서 당시 공수부대여단장이던 전두환에게 표창을 받는 등 군대체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군대를 즐겼다. 행군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산과 강을 보며 걷는 것이 좋았다. 점프도 무섭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황홀했다. 그 기분을 느끼고싶어 오히려 점프가 기다려졌다. 그러나 문재인이 즐기듯 지냈지만 공수부대 생활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문재인이 첫 낙하할 때는 동기 한명이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죽었는데 문재인은 먼저 내려와 그걸 그대로 보고말았다. 상병 때는 부대가 판문점 도끼만행 살인사건의 시비가 된 미루나무를 자르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남북전쟁의 위기로까지 간 상황이었다.

문재인 경남고 71년 졸업생이다. 얼마전 별세한 최동원 선수가 경남고 77년 졸업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희태 김형오 전 의장도 동창이다.


노회찬(56년 생 초량초등학교, 부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노회찬은 1956년 부산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회찬 부모님도 문재인의 부모님처럼 함흥에서 온 피난민이다. 어린 시절 노회찬은 초량의 구봉산을 오르내리며 메뚜기나 필기를 먹고 가끔 뱀도 잡아먹으며 놀았다고 한다. 그렇게 산을 타고 놀았던 게 지금 체력의 바탕이 된 것같다고 한다. 여름엔 초량역에서 의자도 없는 화차에 올라타고 송정, 월례, 기장 쪽으로 놀러다녔다. 노회찬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내내 반장을 했다. 그러나 노회찬은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었다. 골목대장 노릇을 많이 했다. 어린 시절에도 조금이라도 부당하면 어른들에게 대들었고 그러다 엄청 맞기도 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졸업한 부산중학교는 중학교 입시가 있었던 당시 경남지역 명문이었다. 노회찬은 문화적으로도 풍요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졸업과 중학교 입학 사이에 부모님이 악기를 배워보라며 첼로를 사주셨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첼로로 노회찬은 고등학교 때 유명한 선생님에게 레슨까지 받았다고 한다.





노회찬은 고등학교 입시에서 떨어졌는데 당시 노회찬은 낙방은 아무도 예상못한 사건이었다. 노회찬이 지원한 부산고등학교는 명문이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명문 중학교였던 부산중학교에서는 반에서 45등까지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반에서 1, 2등인 노회찬이 그 시험에서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재수 기간은 정치인 노회찬에게 자양분이 되었다. 노회찬은 대성학원에서 재수를 했는데 1등에겐 학원비가 면제되었다. 노회찬은 첫번째 말고는 한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부모님들은 그 돈은 니가 번돈이니 쓰라고 했고 노회찬은 그 돈으로 중국공산당사나 씨알의 소리같은 책을 사보고 영화도 보았다. 재수 기간에 사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노회찬에게 고등학교는 운동권의 시작이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중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하고 배포했고 2학년 땐 교실문을 걸어 잠그고 민청학련 유인물 낭독한 일도 있다. 노회찬의 운동 조기학습은 대학에서도 이어졌다. 79년 대학에 들어간 노회찬은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야 한다는 좀 더 진전된 깨달음을 얻는다. 이때부터 노회찬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1982년엔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서 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하고 위장취업하게 된다.

 
김정길(45년생 거제 장목초등학교, 장목중학교, 부산 동아고)

김정길이 중학교 2학년이던 1960년 4.19가 있었다. 김정길은 자신과 같은 또래인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죽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데모를 계획한다. 김정길이 주동이 되어 거제 장목중학교 학생들이 4.19 데모를 했는데 이 데모는 거제군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4.19데모였다. 김정길은 또 부정한 재단에 항의해서 백지동맹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주동자인 김정길은 놔두고 다른 학생이 처벌되었다. 김정길의 집이 나름 거제 장목면에서 터를 잡아 빽이 있었던 것이다. 김정길은 왜 주동자인 나를 자르지 않고 친구를 자르냐며 등교를 거부했고 결국 김정길의 아버지는 손을 들고 김정길을 부산에 있는 남중학교로 전학시켰다. 거제도 사람 김정길은 이렇게 해서 부산에 오게되었다. 김정길은 중학교 졸업 후 동아고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학창시절은 평이했다. 건강 때문이었다. 어릴 때 잔병치레도 잦았고 늘 허약했는데 고교 시절 유독 심했다. 그때문에 김정길은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부산대 의예과에 2번이나 낙방하고 결국 3수 끝에 2지망으로 부산대 생물과에 입학했다.





김정길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준 사람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꼽는다. 고향 거제 출신 정치인인데다 김영삼 의원의 수행비서가 김정길의 자형이었다. 가끔 집안에 들른 자형의 이야기는 소년 김정길에게 흥미진진했다. 

김정길은 1970년 부산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다. 이듬해 1월 문교부는 <대학교련 강화안>을 발표했는데 김정길은 교련수강을 거부하고 4월 15일 교련반대시위를 벌인다. 피가 튀고 돌이 날아들면서 시위는 격렬했다. 데모의 전통이 약했던 부산대였기에 이날 시위는 당국과 학생들 자신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 날의 시위는 6달 뒤 김정길을 구속시키는 빌미가 된다. 1971년 10월 15일 학원 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대통령 특별명령이 떨어졌다. 대학에 군인이 주둔하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일단 몸을 피한 김정길은 10월 17일 저녁 자퇴서와 함께 위수령 및 휴교령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서 초안을 작성해 학생회 간부를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약속장소에서 기다린 건 경찰이었다. 김정길은 당시 학생운동을 이유로 구속된 전국 유일의 대학생이 되었다. 웃긴 건 구속 사유가 4월에 있었던 교련반대시위였다. 


김정길의 대학시절 
김정길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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