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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역사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여행 공지를 보고 첫번째로 맘에 들었던 건 부담없는 여행경비였습니다. 오천원의 참가비로 교통과 점심이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해보니 여행의 질은 참가비의 10배가 넘는 5만원은 되보였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마련한 행사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람사르환경재단이 마련한 기행은 앞으로도 3번이 더 남았습니다. 10월 이후 일정도 기대되는 여행입니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때 개척된 길로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에 위치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습니다. 동래에서 문경새재까지는 10일이 걸리고 거기서 4일을 더 가면 한양에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문경새재를 통과하는 영남대로는 전국 10대 도시의 절반 이상이 분포하고 조선시대 엘리트가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행정적으로 큰 비중을 둔 길이었습니다. 총연장은 약 380km로 한양에서 부산을 잇는 최단 코스로 지금의 부산대구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45번)를 연결하면 바로 영남대로와 대략 겹칩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름까지 '대로'가 붙으니 이런 길을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조선시대의 도로는 철로나 지금의 도로처럼 잘 닦인 길이 아닙니다. 





지금 등산로와 별 차이가 없는 이런 길이 옛날 우리 조상들이 서울로 올라가던 길이었습니다. 옛길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조선시대 물자는 주로 배를 이용해서 운송했기 때문에 길은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에 만족했다고 합니다.





외국인들이 조선에 와서 불편을 토로하고 놀란 것 중 하나도 도로시설이었다고 합니다.





길이 워낙 좋지않다보니 걷다 실족해서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 걷는 이 길은 명승 31호로 지정된 '토끼비리'라는 옛길로 산 경사면에 개설되어 영남대로 중 가장 험난한 길이라고 합니다. 그 역사성과 지형적 특성이 가장 구체적으로 잘 보존된 한국의 대표적 옛길로 영강과 맞은 편 경관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망도 주는 길입니다. 데크가 설치된 옆의 빤질빤질해진 바위는 우리 조상들이 길을 지나다닌 흔적이라고 합니다. 

옛길 가이드는 토끼비리란 이름의 유래가 와전되어 전해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태조 왕건이 전쟁 중 길을 잃었다가 토끼가 뛰어가는 걸 보고 다시 도망가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는데 그게 경상도 사투리인 토끼다의 '토끼'가 와전되어 나온 게 아닌가 생각된다는 겁니다. 그 비슷한 경우로 개가 지나다닐 정도의 작은 길이란 뜻으로 받아들이는 개비리가 있는데 '개'는 물가를 뜻하고 거기에 길을 뜻하는 '비리'가 붙어 개비리는 물가에 난 길이라고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옛길을 걸으며 지은 조상의 시 한편 소개합니다.


관갑잔도

꾸불꾸불 새재길 양장 같은 길
지천 말 부들부들 쓰러질듯 오르네
길 가는 이 우리를 나무라지 마시게
고갯마루 올라서서 고향 보려함일세

꼬불꼬불 양 창자 같은 길이여
꾸불꾸불 오솔길 기이하기도 하여
봉우리마다 그 경치도 빼어나서
내 가는 길을 막아 더디게 하네

  
 

문경새재 주홀관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과거길이었습니다. 죽령과 추풍령이 있었지만 죽령은 '죽죽' 떨어지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생각했기 때문에 과거길 가는 선비들은 그 길은 피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의 문경(옛 이름 문희도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었다고 함)이란 지명까지 더해져 문경새재는 과거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문경새재는 가장 짧은 길이었습니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갈 때 문경새재는 14일 죽령은 15일 추풍령은 16일이 걸렸습니다.

새재란 이름엔 몇가지 유래가 있습니다.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말이 있고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새(사이)재란 말도 있고,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서 새재라는 말도 있습니다. 





문경새재 입구에 위치한 옛길박물관입니다. 여기 과거와 관련한 재미난 것들을 몇개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로선 한글자라도 더 볼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당시 선비들은 과거길에 이런 작은 책을 휴대하고 본 것 같습니다. 80년대 버스나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문고판 책이 유행했었는데 이 책은 조선시대 문고판 쯤 되는 거 같습니다.





좁쌀책이라고 더 작은 책도 있습니다. 이 책은 걸으면서도 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책뿐만 아닙니다. 과거길을 떠나는 선비들을 위해 붓과 묵 벼루 등도 이렇게 작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걸 보면 사람 사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바뀐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과거길을 오간 선비들은 문경새재에 전설도 남겼습니다. 과거길에 오른 한 선비가 부녀가 살고 있는 집에 유숙을 하게 되었는데 선비가 마음에 든 아버지가 딸을 주어 선비는 삼년 내 급제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대과에 급제한 선비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선비를 기다리던 처녀는 자살하여 큰 구렁이러 변신하였습니다. 이후 구렁이가 길을 가던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혀 이 사실을 알게된 선비가 크게 후회하여 처녀를 위로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야 처녀가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고 합니다. 그후 성황당을 지어 그 처녀의 원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매년 지내고 있습니다.





영남대로는 행정적으로도 중요한 길입니다. 문경새재 첫관문인 주홀관과 그 다음 조곡관의 중간 지점에 있는 교귀정인데  이 곳에서 신구 경상감사가 만나 업무를 인수인계했다고 합니다. 





지방관리의 선정을 칭송하는 비석들입니다. 이곳을 오가는 많은 관리와 선비들이 이 비석을 보고 마음가짐을 바로 잡았을듯합니다.


조령원 담장




길에는 반드시 있어야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숙박시설입니다. 조선시대엔 관리들을 위한 역, 원과 일반인을 위한 주막, 객주 등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영남대로에만 역이 30여개, 원이 165곳이나 있었다고 합니다.원이 쇠퇴하면서 주막이 번창했는데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먹으면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았습니다.





문경새재 조령원입니다.



 

토끼비리 근처 주막의 모습





길에는 조상들의 삶의 흔적들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돌탑은 조산이라고 합니다. 이 조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취약한 지점에 만들어 보강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조산은 유사시 무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행주대첩에서 여성들이 돌을 날랐다는 얘기가 있는데 바로 이런 데서 옮긴 돌이었다고 합니다.





소나무에 새겨진 v 모양의 이 상처는 일제말기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해 송진을 채취한 자국입니다. 송진은 일본군의 연료로 쓰였다고 합니다. 





문경새재엔 문화유적만 아니라 아름다운 경치도 같이 합니다. 주홀관을 지나 올라가는 길엔 이런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곳이 즐비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길을 가다 이곳에서 목도 축이고 땀을 씻기도 했을 겁니다. 





국방상의 요충지이기도 한 문경새재의 고모산성입니다.  













가이들의 설명에 의하면 성이 정확히 복원된 건 아니라고 합니다. 


조령원터




옛날 성벽은 이렇게 계단식이었다고 합니다. 





이날 마침 어떤 한 방송 매체의 드라마(광개토대왕)가 촬영중이었습니다.





전투 모습을 보나 기대했는데 이날은 그냥 배경장면만 찍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찍어 컴퓨터로 산도 없애고 병사들은 몇배로 늘려 스펙타클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날 함께한 일행들의 모습입니다.







점심은 메기탕을 먹었습니다. 4인분에 5만원인데 메기가 엄청나게 많이 들었더군요. 메기탕 좋아하는 제가 남겼을 정도이니. 





문경새재를 내려와 마신 오미자 막걸리입니다. 가이드께서 한턱 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10월 4일 다음 기행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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