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photomu님 제공 사진




대한민국 선거 역사상 최고의 카피를 뽑으라고 한다면? 1985년 2.12총선에서 나온 "아빠는 박찬종 엄마는 김정길"을 능가할만한 것이 있을까? 이 카피는 당시 부산 중동영도구에서 3위로 탈락이 예상되었던 김정길 후보를 1위로 당선시키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이변이었냐면 선거 당일까지 이무도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김정길 전 장관의 부인이 선거 당일 당선이 유력했던 민정당 윤석순 후보 부인에게 “김정길 후보님은 아직 젊으니까 다음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란 위로의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이 선거에서 탈락한 쪽은 윤석순 후보였다. 

당시 김정길 전 장관이 상대했던 후보들 면면을 보면 이 카피가 만든 이변의 크기가 어느 정돈지 실감할 수 있다. 여당인 민정당의 윤석순 후보는 민정당 사무차장이었다. 그는 직함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실세였는데 전두환의 사돈이었다. 박찬종 후보는 고향 선배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정길 전 장관을 배제하고 공천할 정도로 야당 거물이었다. 그때문에 김정길 전 장관은 민한당 공천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 노차태 후보도 돈차태로 불리며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들 김정길 전 장관이 잘 해야 3등일 것으로 봤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최고의 카피라 하는 건 아니다. 이 카피가 찬사받는 더 큰 이유는 당시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야당의 두 후보를 모두 당선시키는 쾌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여야로 양분되는 표심의 구조 속에서 야당 후보 2명이 당선되는 건 3위 예상 후보가 1위 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다. 김정길 후보는 자신이 만든 카피로 낙선이 예상된 자신을 1등으로 당선시켰을뿐 아니라 야당의 다른 후보까지 동반당선시키는 두번의 기적을 일으켰던 것이다.

6.24일 부산 민주공원에서 백인닷컴과 갱상도블로그 주최의 김정길 전 장관 SNS 인터뷰가 있었다. 여기서 당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에 얹어주는 당시의 얘기는 지금 들어도 통쾌했다. 김정길 전 장관이 들려준 당시 얘기는 이랬다.


"내가 기호가 4번인데 연설 순서도 4번째로 뽑았어요. 1번 윤석순 후보는 중앙에서 돈을 많이 끌어와 부산 발전 시킨다고 하고 노차태 후보는 동구 발전 시키겠다고 하고 박찬종 선배는 압도적으로 자신에게 표를 몰아달래요. 연설 들으면서 나는 어떻게 연설할까 곰곰히 생각을 했지. 난 연설할 때 얘기해야할 순서만 몇개 적고 즉홍으로 하거든요."


성남초등학교 유세는 선거 5일 전에 있었다. 성남초등학교는 동구에 있었는데 노차태 후보는 유세 장소를 의식해 발언한 것이다. 박찬종 후보는 야당 지지 성향의 표가 김정길 후보와 자신 양쪽으로 갈려 혹시나 잘못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몰표를 외친 걸로 보인다.


“존경하는 부산시민 여러분! 오늘 앞에서 하신 세 분 후보들의 연설을 잘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여기 있는 후보들 한 사람도 서운하지 않게 투표합시다. 먼저, 부산 발전시키겠다는 윤석순 후보, 부산시장 시킵시다. 동구 발전시키겠다는 노차태 후보, 동구청장 시킵시다. 그리고 국회의원은 군사독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야당 후보 두 사람을 뽑아주십시오. 

그런데 박찬종 선배에게 표를 몰아 찍어주면 저 김정길은 떨어집니다. 존경하는 부산 시민 여러분. 야당 후보 두 사람을 뽑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아빠는 무조건 박찬종 선배 찍으십시오. 엄마는 무조건 이 김정길이 찍으십시오. 그래야 야당 국회의원 두 사람이 모두 당선될 수 있습니다. 아빠는 박찬종, 엄마는 김정길!”

연설 부분은 간담회 내용과 차이가 없어 '김정길 자전에세이 희망' 중에서 인용합니다. 이하 



이날 연설의 반향은 컸다고 한다. 김정길 후보의 선거 카피는 그대로 지역과 중앙 일간지의 기사 제목으로 뽑혔다.


"많이 생각했죠, 아빠를 할지 엄마를 할지. 아빠는 진지하게 생각 안하는데 엄마는 잘 기억하거든. 아빠는 김정길보다 엄마 김정길이 낫겠더라구요"


엄마들이 충성도가 더 높긴 하지만 그게 기적적인 선거 결과에 대한 답이 되긴 부족해 보인다. 김정길 카피의 절묘함은 가부장제 국가에서 박찬종 후보에게 아빠를 붙여 대우해 주었던 점이다. 만약 '아빠는 김정길'이라고 했다면 남성 유권자들은 심드렁했을 것이다. '엄마는 김정길'이 여성 유권자의 사명감과 동정심을 자극했고 남성 유권자에겐 자신을 먼저 내세우지 않는 겸손으로 호감을 주었을 것이다. 아빠와 엄마의 그 미묘한 차이가 김정길 97,688표, 박찬종 83,463표, 윤석순 67,060표로 엄마와 아빠가 찍은 김정길 후보와 박찬종 후보가 1, 2위로 당선되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선사례를 나갔다... 가게나 사무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일부러 길거리까지 나와서 박수를 치며 환호해주었다. 국제시장 상인들과 광복동 주민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행렬의 끝이 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웠다. 나도 감격했고, 부산시민들도 감격했다. 늘 떨어지던 김정길이가 당선되었다는 것도 감격스러웠겠지만, 부산시민의 손으로 여당이 아닌 야당만 뽑았다는 것이 더 감격스러웠다.

'김정길의 자전에세이 희망' 중에서 인용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정치인이 주는 감동이다. 김정길 후보는 말 한마디로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몇배로 실현해냈다. 독재 정권 하에서 자신들도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를 보고 시민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민들의 간절한 열망에 정치인의 탁월한 한마디가 어울려 야도 부산, 민주주의 성지 부산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김정길 전 장관은 내년 총선 출마를 약속했다. 부산에서 최소 5석을 확보하는 야권 돌풍을 일으키겠다고 다짐했다. 부산 지역의 야권에 대한 기대는 여론조사 등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정치인의 역할만 보태지면 부산에서 대이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김정길 전 장관은 내년 총선에서 야도의 부활을 꿈꾸는 시민들에게 1985년 같은 감동을 안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게인 1985엔 어떤 최고의 선거 카피가 나올지 궁금해진다.


photomu님 제공 사진

 

반응형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