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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 책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구술을 받아 적은 기록이다. 저자 오도엽은 이 책을 쓰기 위해 꼬박 2년 동안 이소선 여사와 함께 살았다. 2년 간 두 사람은 모자처럼 지냈다. 작가는 어머니의 옛날 얘기를 듣듯 이소선 옆에서 밤새 졸면서 들었고 이소선은 작가 오도엽을 마치 아들처럼 챙겼다. 


"다시 뵙겠습니다." 
"다시는 뭘. 이제 일이 년이나 살겠어. 이게 마지막이지."...
 이소선의 이 말에 나는 창신동에 주저앉았다. 이소선 몰래 녹음기를 켜놓고 밤부터 새벽까지 이야기를 했다. 아니 이소선은 이야기를 하고 나는 졸았다. 졸고 있으면, 너 지금 자냐? 하며 깨우면 눈을 떳다가 아뇨, 하며 다시 졸았다.

이소선은 늘 내가 배고플까 걱정이었다. 유가협에 가셨다가도 끼니때가 되면 전화를 하거나 밥을 차려 주러 올라왔다.


노동자의 어머니로 알려져있었지만 이소선은 사실 내적으로 상처투성이였다. 아들 전태일의 얘기를 하고나면 사흘을 아파 누워있어야 했다. 언제부턴가는 약 없이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낸다.

 
이소선은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가슴에 불이 일어 약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한다. 물론 약을 먹어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숱하다. 


이소선이 가슴을 억눌러가며 전한 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마지막 순간은 이렇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환자가 되고 ,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엄마가 안 하면 그걸로 끝난다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란 말도 하고 그때 뭐 별말 다 했지.

"어떤 물질이나 유혹에도 타협하지 마세요. 내 부탁한 거 꼭 들어주시겠죠?"

참말로 기가 차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듣고만 있었지.


그후 이소선은 전태일의 유언대로 투사가 되었다.

 
이소선이 사라진 아들의 일기장을 찾으러 노동청에 가서 싸웠다. 노동청장이 찾아와 거만을 떨자 아예 목덜미를 이빨로 깨물어 쫓아 버려다.


이소선은 아들 전태일의 유언을 몇배로 지켰다. 


청와대를 오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무슨 일인가 쳐다보고 지나갔지만 이소선은 입을 다물고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청와대에서 왜 그런지 알아보라고 시켰나 보다.

"아주머니, 여기에 왜 앉아 있어요?"

"대통령 각하를 만나려고요."

한달이 지나고 나니 청와대에 소문이 자자하게 났다. 대들거나 소리를 지르면 어찌하겠는데, 그냥 조용히 앉아있다가 가니 어쩔 도리도 없다. 

그런데 눈 앞에 박정희와 육영수가 앉아있지 않은가. 박정희 옆에 군복을 입고 어깨를 착 편 채 꼿꼿이 서있던 사람이 위협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마디만 하면 된다 했으니 이제 각하께 한마디만 해요. 그리고 다시는 오면 안됩니다."


아들 전태일을 생각하면 대통령도 두렵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재수 없다며 거들떠 보지도 않는 죽은 사람 옷을 영안실에서 구해 왔다. 영안실에서 나오는 옷들은 피범벅이었다. 흐르는 물에 피묻은 빨랫감을 담그면 개울이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아들이 돌봐주라던 노동자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런 이소선은 점점 권력의 눈엣가시가 되어갔다.


장기표가 묵비권을 행사하자 이소선이 나서서 검사를 나무랐다. "나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아가라. 판사가 이소선에게 퇴정 명령을 내리면 이소선은 되레 잡아가라며 대들었다. 박정희 정권은 더 이상 이소선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장기표 재판정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구속된 이소선은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수원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첫번째 징역
 


"소문대로 골수 빨갱이네"
"빨갱이? 너 뭐라 했냐. 나보고 빨갱이라 했냐. 내가 왜 빨갱이냐!"
이소선은 침대에서 일어나 수사관에게 달려가더니 멱살을 잡으며 따졌다.


그래도 이소선은 기가 꺽이지 않았다.


판사 자리에 앉은 군인이 물었다.
"이소선 피고인"
"야 니가 뭔데 나한테 피고인이라고 그래. 재판장이 물어봐야지. 왜 네까짓 군발이가 끼어드냐!"
판사는 기가 막혀 이을 다물었다.
"군법재판에는 군인이 판사입니다. 대답하세요"



두번째...
 


이소선은 징역 10월을선고받았다. 세번째 징역이다. 아들 전태삼과 함께 재판정에 서야 했다. 전태삼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전태삼은 세살배기 딸 여진과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쌍둥이 아들 동준, 동명을 두고 구속되었다. 


세번째는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과 함께 복역했다.


이소선은 노동자의 어머니라 불렸다. 심지어 재야의 유명인사들도 이소선에겐 깍듯하게 어머니라 불렀다.


문익환 목사가 춤을 추라고 부추겼다. 문 목사는 이소선보다 나이가 열한 살이나 더 많다. 하지만 늘 어머니라 부르며 존대했다. 전태일이 세상을 깨우고 나를 깨우치게 했으니 당연히 전태일의 어머니는 노동자의 어머니고 자신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이소선은 민망해 몸 둘바를 몰랐다.


이소선은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어머니였다. 문익환 목사나 김대중 대통령 두 분다 이소선 여사보다 나이가 많았다.
 

"총재님 빨리 돈 주시오"
 
이소선은 비서들이 집으로 들어가자고 해도 모른척했다. 작심을 하고 온 터였다. 달리 기댈 곳이 없었다. 김대중 선생이 창문을 열고 내다보며 손짓했다.
 
"비도 오는데 어서 들어오세요, 어머니."
 
김대중 선생도 이소선에게 어머니라고 불렀다. 이소선과의 인연은 전태일이 항거했을 때 김대중 선생이 병원에 찾아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날 이소선은 김대중 선생에게 남은 그림 을 받았다.


이소선은 챙겨주고 보듬어주는 그런 어머니이기만 하지 않았다. 그는 의식도 어머니였다. 


단병호가 위원장 할 때 노동자대회 한다고 노동자들이 엄청 모였을 때 내가 그랬어. 길거리에서 맞아 며 싸우면서 데모하고 그럴 필요 없다고. 여기 시청 광장에 요구 조건 세 개만 딱 싸들고 사흘만 앉아있으면 한 개는 해결된다고. 한꺼번에 모여서 그냥 어디 안 가고 버티기만 하면 되다고. 그런데 그게 안돼. 원천 봉쇄한다 그라면 그냥 공장에 가지 않고 사흘만 한꺼번에 마음 합쳐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면 돼. 그러면 잡아가지도 못하잖아.


우린 전태일을 기억한다. 이소선은 전태일의 어머니로 기억한다. 전태일과 이소선 둘 다 기억해야 한다. 두 사람은 모자지간이면서 동지였다.


태일이가 나를 참 좋아했다. 아직도 이거 버리지 않아. 겨울엔 꼭 이 내의를 안 입냐. 태일이가 엄마 준다고 공장에 남은 천으로 만들어 온 거 아니냐. 앞뒤 색깔이 다르지. 엄마 남은 천으로 만드니까 이래. 다음에는 꼭 새 옷 사드릴께 그랬어.


이소선은 아직도 40년 전 아들 전태일이 만들어준 내의를 버리지 않고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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