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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검의 반전이 즐겁다.



기가 막힌 반전이다. 사인검을 반전의 재료로 삼을 줄이야. 이건 콜롬부스의 달걀과도 같은 반전이다. 이야기의 뼈대로 알고 있던 것이 툭 떨어져 나가 반전의 소재가 된 것이다.

사인검은 창휘 얘기의 기둥이었다. 창휘는 그 사인검이라는 기둥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다. 사인검에서 창휘가 왕이 되어야 하는 숙명이 나오고 그 숙명을 놓고 고민하면서 창휘는 명분뿐인 왕에서 진정한 왕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 이야기였다. 사인검은 창휘의 숙명성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그런 장치로만 보였다. 그런데 그 사인검이 가짜라니. 거짓 명분에 20년을 살아온 창휘는 그렇다면 그간 헛짓거리를 했던 것이다.

'가짜사인검'은 힘빠진 드라마에 마지막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궁여책인가? 이제 보여줄 건 없는 작가가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주인공 '기억상실증' 만들어 놓고 욕 처들어 먹는 그런 얄팍한 술수인가.
 
만약 이게 홍자매의 홍길동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홍자매는 사인검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이 반전을 대비하여 치밀하게 극을 준비해 왔다. 사인검이 가짜로 밝혀졌지만 홍자매는 다른 쪽에 둑을 구축해서 시청자의 감동과 긴장이 새나가지 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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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드라마는 '명분'에 관한 논쟁을 벌이며 명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창휘의 심복대감이 왕(광휘)에게 명분없음을 얘기하자 광휘는 '명분'을 부르짖으며 시청자의 뇌리에 명분이란 단어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출연자들이 이 명분을 읊조릴 땐  명분 원래의 이미지와 달리 엺은 미소를 띄며 말하면서 부정적 뉘앙스를 풍겼다.

홍자매는 이렇게 명분을 부정적으로 말하면서 시청자의 사인검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명분이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는 길동을 약올리는 단어가 되고 광휘(왕)을 속이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데 이용되면서 명분은 단어 자체의 힘을 잃었다. 급기야 사인검이 가짜로 밝혀지기 직전 윤대감은 명분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사인검의 해체 작업을 마무리 한다.

가짜 사인검이 말하는 건 뭘까? 창위 입장에서 보면 알량한 명분에 매달려 살아온 삶에 대한 비판이다. 그 칼에 적힌 명분에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온 창휘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그건 길동을 만나기 전의 창휘까지만 유효한 비판이다.

창휘는 이전 거사에서 길동 때문에 왕이 되지 못했지만 아마 그때 왕이 되었다면 좋은 왕이 되지 못했을 거라는 고백을 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명분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은 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명분이 헛됨이 밝혀진들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왕이 될 자질은 갖추었고 사인검이 아닌 길동과 백성들이 그게에 왕이 될 명분을 주고 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가짜사인검'은 명분의 허상에 관한 얘기다.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명분은 대부분 기득권이 만들고 조작해낸 것들이다. 창휘는 왕이되지만 길동은 왕이 될 수 없는 것은 길동이 명분이 없음이 아니라 지배세력이 길동이 왕이 될 명분을 만들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명분은 명분을 만드는 자들 것일뿐이다. 명분의 허상을 항상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녹은 할아버지와 함께 가짜 약을 팔던 소녀다. 이녹은 대결을 벌여 자신을 이기는 남자를 서방으로 맞이하겠다는 상술로 돈을 번다. 지금으로 말하면 단란주점 소녀랄까. 길동은 양아치다. 시장의 물건을 맘대로 집어가고 모두들 싫어한다. 술집에서 여자 둘을 끼고 하룻밤을 지내기도. 단란주점 소녀와 양아치의 결합. 한마디로 명분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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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첫회는 이 단란주점 소녀와 양아치가 탐관오리를 혼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건 심정적으로는 지지하지만 명분 없는 짓이다. 그러나 이게 바로 저항이다. 저항의 대부분은 명분 없는 것들이다. 기존 사회의 명분에 도전하는 것인데 어떻게 명분을 차릴 수 있단 말인가. 이 사회가 생산한 명분에 위축되어 명분 있는 저항만 하려면 저항은 어렵다. 저항은 기존 사회의 명분과 질서의 흔들기를 통해 경고를 보내는 것인데 기존 질서 안에서라면 어떻게 그들에게 경고를 줄 수 있단 말인가. 말이 안되는 소리다.

프랑스의 저항이 그렇다. 68혁명 때 기성세대가 기가막혀했다고 한다. 이상주의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며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야단을 쳤다. 그러나 그때 68세대가 주장하던 것들이 프랑스에서 현실화 되거나 이젠 문명사회의 가치가 되었다. 말도 안되는 것이 말이 당장에 또는 십수년만에 말이 된 것이다. 이것을 봐도 기득권이 말하는 명분이란 게 얼마나 허상인가를 알 수 있다.

앞으로 남은 3회, 창휘는 왕이 되고 길동은 그 도우미 역할을 충실히 할것같다. 그럼 이게 뭔가? 이건 홍길동전이 아니고 이창휘전이다. 그렇진 않다. 이 드라마는 '홍길동과 이창휘' 전이다.

길동과 창휘는 서로 다름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간다. 창휘는 주위의 대신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길동을 챙기고 길동은 왕이 되라는 민심을 외면하고 창휘라는 왕을 만들기에 주력한다. 길동이 창휘에게 "왕처럼 미치지 않을 자신 있어?"라고 물을 때 이미 이야기는 결정되었다.

둘은 친해지고 이해하되 본성을 바꾸지 않는다. 창휘는 오히려 왕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길동은 그 왕이 될 사람에게 끝까지 반말하면서 저항의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

상반된 두사람 어디에도 기울지 않고 끝까지 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이건 지배와 저항의 공존을 말하는 것이다.

길동은 분명히 창휘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할 것이라고 말한다. 첫회에 보여준 탐관오리 혼내는 것은 바로 그가 계속 그의 방식을 고수하고 창휘도 그걸 인정했음을 말해준다. 창휘는 길동의 방식, 바로 저항이 활개친다해도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안다. 그에겐 보다 강력한 명분이란 무기가 있다. 그가 명분만 올바르게 갖춘다면 그 저항들을 흡수해서 사회를 더 공고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배만 있는 사회는 약하다. 사회가 굳건하기 위해선 지배와 저항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야 한다. 창휘는 길동을 통해 그걸 깨달은 것이다. 아마 길동은 자신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창휘를 왕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저항에 짜증내는 그런 사회는 위험하다. 저항의 길동과 지배의 창휘가 서로 공존하는 사회. 그게 우리가 만들어야 할 사회라는 걸 홍자매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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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광휘 연기 왜 저리 잘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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