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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않을만큼 아파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고통을 당해봐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고 인간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뜻이다.

고통은 고통에 대한 공감만 아니라 보호본능도 강화 시킨다. 고통을 당하면 다시는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 고통의 근원에서 최대한 벗어나거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에 집착하게 된다. 




초인(강동원)의 초능력은 어릴 때 잘려나간 다리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다리가 잘리는 고통이 어린 초인의 보호본능을 강화시키면서 초능력을 깨웠을 것이다. 

반면 규남의 초능력을 깨우는 건 타인의 고통이다. 유토피아 사장의 죽음이 규남을 초인과 대결하게 만들었다. 영화 마지막에는 초인과의 대결로 반신불수가 된 규남이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려다 다시 몸의 능력을 되찾는 장면도 나온다.  




초인과 규남 둘다 초능력자이지만 각자의 초능력을 깨운 인자는 다르다. 그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비슷하다. 살아오면서 누구나 고통을 겪으며 성장 하는데 어떤 이는 보호본능을 강화하고 어떤 이는 공감을 더 깊이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부당거래의 주양 검사는 보호본능을 강화해온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최철기 반장에게 주양 검사는 자신이 검사가 된 이유가 겁이 많아서라고 한다. 최철기에 대한 주양 검사의 솔직한 조롱이다. 고통에 대한 보호본능이 주양 검사로 하여금 힘에 집착하게 만든 것이다. 

영화 그린마일의 사형수 그린마일은 고통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감추는 깊고 뼈저린 고통까지 감지하고 치유해준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눈물 흘리는 그린마일은 고통에 대한 공감 그 자체이다.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면 고통에 대한 공감과 보호본능의 인자는 X Y 두 축이 된다. 사형수 그린마일은 공감의 축에 붙어 무한대로 뻗어있을 것이고 부당거래의 주양 검사는 약간의 간격만 둔 채 보호본능의 축에 엎드려 있을 것이다.




초인이 포악해진 건 자신의 힘이 규남에게 좌절당하면서부터이다. 모든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초인은 규남에게 무시당했다.




규남은 자신을 임대리라 불러준 죽은 사장을 생각하며 초인을 쫓는다. 모든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규남은 유토피아 사장에게 인정 받았다.

규남과 초인의 싸움은 단 한번 인정 받은 사람과 딱 한번 무시 당한 사람의 싸움이다. 단 한번 인정 받은 규남이 딱 한번 무시 당한 규남을 이긴 이유는 뭘까. 딱 한번의 무시에 발광하는 초인은 권력이고 단 한번의 인정에 신바람이 난 규남은 민중이다. 민중이 권력을 이겨야 되지 않을까.




영화 초능력자의 액션이 독창적일 수 있었던 건 무표정하면서도 신속하게 초인의 의지를 실현하는 군중 장면 덕분이다. 군중은 초인에게 일일이 지시받은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지시받은 임무를 수행하한다. 초인에게 총을 건네는 경찰의 모습에선 분명한 행동 의지가 느껴진다.

과정을 수행하고 명령을 대기하는 의지와 무의식 사이를 오가는 군중의 모습은 공포스럽다. 초인에게 조종당하는 군중은 자신의 행동 목적은 알지만 그 의미는 모른다. 영화의 액션이 미디어에 조종 당하는 대중의 실체를 말하는 것 같았다.

같이 본 지인은 재밌긴한데 영화가 좀 뻘쭘한 부분도 있다고 했다. 연결이 어색하고 좀 더 극적 효과를 살리지 못한 부분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도 정말 영화사에 남을 대작이 될 수 있었는데 이런 좋은 얼개가 좀 더 다듬어지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충분히 볼만하고 재밌지만 매트릭스만큼 길이 남을 매력적인 작품이 나올뻔했다고 생각하니 그 다듬지 못한 부분이 더 아쉽게 다가오는 것이다. 

당신에게 잊혀지지않을 강한 인상을 남길 영화를 원한다면 초능력자를 추천한다. 영화가 끝난 후 많은 생각 꺼리들을 안고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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