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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앞에서 오던 여승무원이 갑자기 내 앞에서 멈추더니 무릎을 끓었다. 순간 긴장했다. 낯선 젊은 여성이 남자인 나에게 복종적인 자세를 취하는 건 처음 당해보는 경험이었다. 다행인 것은 여승무원이 향한 쪽은 옆자리 손님이라는 것. 내가 아니라 덜하긴 했지만 여승무원의 복종적인 자세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당혹스러웠다.  

서비스경쟁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서비스를 수행하는 노동자가 성적수치심이나 모멸감을 느낀다면 그런 서비스는 사회적으로 허용되어선 안된다. 손님 앞에 무릎을 끓는 서비스는 어떨까? 분명한 건 내가 그 서비스를 받고 당혹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내가 당혹감을 느낀 건 나에게 복종적인 자세를 취한 서비스 노동자에게 모멸감을 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에게 복종적인 누군가 앞에서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주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가 않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저는 지금 당신을 무시하지 않습니다'라는 신호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보면 몸과 표정은 굳어져버린다. 이렇게 볼 때 무릎을 끓는 서비스는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말아야할 서비스라는 혐의가 있다.

무릎을 끓는 게 성차별적 서비스 일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무릎을 끓는 서비스는 식당 등의 접객업소에서 대개 이루어지는데 이런 서비스는 대부분 여성들이 수행한다. KTX에서도 승객에게 무릎을 끓은 건 여자 승무원이었다. 남자 승무원이 무릎을 끓는 건 보지못했다. 종사자들이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이니까 무릎을 끓게 하는 이런 복종적인 서비스가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릎을 끓는 서비스가 허용되지 말아야할 서비스라는 혐의가 점점 짙어진다. 

서비스 노동자의 복종적 태도는 익숙하지 못한 불평등한 인간관계를 마주해야하는 소비자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긴다. 사실 이렇게 거북한 서비스(복종)가 향하는 건 소비자보다는 그들을 고용한 자본일 것이다. 자본은 소비자를 대리로 내세워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로부터 복종의 표시를 받는다. 사회에 만연한 서비스지상주의에 서비스 노동자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자본을 대리한 소비자에게 복종을 표한다. 여기서 소비자가 자본의 노동통제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혐의도 하나 추가된다.  

서비스 노동자에게 소비자가 바라는 건 친절한 도움이지 복종은 아니다. 서비스에서 편안함만큼 가장 큰 가치가 없을 것이다. 소비자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도 무릎끓는 서비스는 안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리고 소비자도 자신이 받는 서비스가 노동통제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여 과도한 서비스는 거부해야한다고 본다.


* 녹색 표시는 댓글을 보고 떠올린 내용을 추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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