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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화살로 쏘아죽이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천지호는 자신을 황철웅 앞에서 그대로 노출시켜 버리고 말았다. 천지호의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이다. 황철웅의 날고기는 무술 실력을 감안하면 이제 천지호는 죽은 목숨이다. 그러나 천지호는 죽지않고 황철웅에게서 간단히 빠져나온다. 천지호는 어떻게해서 살인귀 황철웅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을까? 

만약 천지호가 뒤돌아서 도망쳤다면 황철웅은 천지호를 잡았을 것이다. 황철웅은 예리한 공간 추적으로 도망자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천지호는 예상을 뒤엎고 칼을 빼들고 황철웅에게 달려들었다. 도망치는 천지호를 잡으러 갈 것으로 생각했던 황철웅은 순간 자세를 바꾸어 상대와 일전을 준비하고 마주 달린다. 그러나 칼을 겨누는 순간 천지호는 칼을 버리고 그 길을 달려 그대로 도망가버린다. 잠깐 사이 황철웅은 천지호에게 두번 속았다. 

황철웅을 두 번 속이면서 천지호는 도망을 위한 시간을 벌었다. 마주오던 그 길은 뒤돌아 도망가는 것보다 몇걸음을 더 벌어주었다. 황철웅이 일전을 예상하다 '뭐지'하며 예상외 상황에 멈칫하는 사이 천지호는 또 몇 걸음을 더 벌었다. 그리고 천지호는 이렇게 벌은 몇 걸음을 인근에 숨는데 사용했다. 지금같이 전기불이 불을 밝히는 밤이라면 모를까 조선시대의 밤이라면 달아나면서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 인근 풀숲에 숨어 숨죽이는 게 상대를 따돌리기에 더 적절할 수 있다. 병사들도 거느리지 않은 황철웅이 인근 풀숲을 다 수색할 수는 없다. 최악의 경우 황철웅은 숨어서 노리는 천지호에게 칼을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황철웅은 경고만을 남겨두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말은 쉬워보이지만 사실 이런 작전을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황철웅의 무술 실력을 알면서 무서워하지 않아야 하고 자신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상대를 지척에 두고 숨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 이건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자세의 문제다. 실력이 떨어지는 천지호가 고수 황철웅을 따돌릴 수 있었던 건 그가 황철웅보다 한 차원 높은 삶의 자세를 가지기 때문이다. 황철웅이 3차원이라면 천지호는 4차원에 있다. 황철웅이 공간의 차원만 생각할 때 천지호는 심리 차원까지 꿰뚫기 때문에 황철웅의 칼이 허공을 가르는 것이다.

천지호가 황철웅보다 높은 차원의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그건 천지호가 삶을 만들지 않고 맛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을 만들려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만든 삶이 흐트러지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그러나 삶을 맛보는 사람은 뭔가를 만들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이 삶은 어떤 맛일까?', '저건 또 무슨 맛일까?' 하며 삶의 맛을 느낀다. 달면 즐기고, 시면 고이는 침을 삼키고, 쓰면 인상 한 번 찡그리고 넘기면 그만이다. 카드할 때 잃어도 되는 돈으로 레이스를 펼치는 사람들이 여유부리며 오히려 돈을 따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맛보는 자들은 만들려는 자보다 삶을 지배할 가능성이 더 높다.  

천지호의 삶을 맛보는 자세는 사실 능동적인 깨우침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없는 계급에 속한 그에게 주어진 비범한 삶이 맛보기 뿐이었을 것이다. 청년시절  삶이 찢어져 더 이상 이룰 수 있는 게 없던 대길이가 어쩔 수 없이 택한 삶도 마찬가지다. 천지호보다는 아직 덜 깨우친, 미련이 조금은 더 남은 맛보기 삶이 바로 대길의 삶이다. 그래서 둘은 비슷한 웃음을 짓고 서로의 의중을 금방 알아차린다. 

삶을 맛보는 건 사회의 성취로부터 차단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삶의 자세일까? 우리는 삶을 이룰 수 없을 때라야 삶의 맛을 느끼는 걸까? 우리가 인생을 맛보면서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면 세상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삶을 맛보면서도 누구보다 더 크고 위대한 삶이 있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떨어질줄 알면서도 지역주의의에 도전한 것은 삶을 맛볼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에야 대통령 되기위한 포석이었다고 하지만 그때는 누가 그런 이력을 알아주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2002년 선거 전날 정몽준 자택에 들어가 빌어보라는 사람들 앞에서 대통령 안해도 된다며 자리를 일어선 것도 못 만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보다 맛 한 번 잘봤다며 털고 일어서는 맛보는 자의 특권이었다. 야당 앞에서 사과 한마디를 하지 않아 탄핵을 부른 건 만드는 인생을 사는 자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맛보기 인생의 경지다.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승부를 즐겼다고 하지만 그건 어떤 결과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맛보기 인생의 자세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룬 그 것들은 이렇게 삶을 맛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새로운 세계와 시대를 우리가 만들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세계와 시대에 던져질 뿐이다. 따라서 '던져진다'는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새로운 삶과 대면하지 못한다. 삶을 맛보려고 할 때 우리는 보다 과감해질 수 있다. 삶을 만들려는 자는 기존의 삶을 맛보면서 뭔가를 만들고 있다고 착각한다. 실제로 그들은 반복된 삶을 쌓고 있을 뿐이다. 체제 내의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좌의정이 그렇고 팔려간 딸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아버지 노비가 그렇다.

천지호는 발가락을 간질러 달라는 유언을 대길에게 남기고 떠났다. 노무현은 작은 비석 하나 세워달라고 하고는 떠났다. 맛보는 인생을 살아온 자들이 남긴 유언은 이렇다. 차이는 그거다. 천지호는 될 수 없는 인생 맛이나 보자며 살았고 노무현은 안되면 맛은 잘 봤다는 자세로 살았다. 천지호는 파괴되는 삶을 맛봤지만 노무현은 생성하는 삶을 맛봤다. 오늘날 될 수 없는 인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맛보기 인생을 즐기기로 한다면 우리는 모두 노무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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