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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km로 부산 걷기




지난 두 번의 기사에서 동광동과 중앙동 사이를 이어주는 계단들을 살펴봤습니다. 이번 기사에선 그 계단 앞에서 바다를 향해 펼쳐진 공간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계단을 내려서면 아주 넓은 평지가 펼쳐집니다. 꼬불꼬불한 길과 높낮이가 불규칙한 계단 위와는 아주 판이한 공간입니다. 건물과 길들이 평지 위에 아주 반듯하게 잘 구획되어 나타납니다. 




이에 대해선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계단 위와 계단 아래가 이렇게 단절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래 평지가 100년 전 매축에 의해 생겨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100년 전엔 40계단 부근은 해안이었습니다. 동광동의 가파른 절벽들이 해안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40계단은 해안이 매축된 후 절벽과 매축지를 연결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합니다.   




매축 후 얻은 바다 위의 이 땅은 처음 '새마당'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새 땅이니까 잘 구획되었습니다. 좋은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우체국이나 세관 등 조선 최초라 하는 행정 기관들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이 곳엔 한국인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광복 이전 부산에 6만명의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부산 인구의 1/3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지금의 중구지역에 몰려 살았습니다. 1923년 나온 염상섭의 만세전을 보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두를 뒤에 두고 곱들어서 전차길 난데로만 큰 길로 걸어갔으나, 좌우 편에 모두 이층집이 죽 늘어섰을 뿐이요. 조선집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눈에 띄는 것이 없다. 2, 3정도 채 가지 못하여서 전차길은 북으로 곱드리게되고, 맞은 편에는 극장인지 활동사진관인지 울그데불그데한 그림조각이며 깃발이 보일 뿐이다. 삼거리에서 한참 사면팔방을 돌아다 보다 못하여 지나가는 지게꾼더러 조선사람의 동리를 물었다. 지게꾼은한참 머뭇거리면서 생각을 하더니 남편으로 뚫린 해변으로 나가는 길을 가르치면서 그리 들어가면 몇 집 있다 한다. 나는 가르치는대로 발길을 돌렸다.(부산 지역 문화 예술 속에 나타난 부산성의 모색 중에서)




염상섭의 소설 속 지게꾼들은 바로 앞의 항구나 부산역에서 일거리를 받아 살아갔습니다. 농사만 짓던 조선사람들이 한국 속 일본 땅이 되버린 부산의 도심지 살다보니 날품 파는 것 말곤 달리 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마 일제시대 중구 지역을 토대로 살아가던 한국인들 표정이 대부분 이랬을 겁니다. 그들의 얼굴은 힘든 노동과 기약 없는 앞날을 말해줍니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새마당'의 지게꾼들이 몸을 누이러 들어간 집입니다. 일제시대 부산부(당시는 부산시가 아닌 부산부) 빈민굴은 전국적으로도 악명 높았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일본인의 도시였던 중구지역은 해방된 후에는 귀환동포의 도시와 피난민의 도시가 됩니다. 광복 후에는 20만이 넘는 귀환동포가 체류하였고 6.25 전쟁 때는 수십만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었습니다. 1945년 이전 일본인 포함해 30만명이었던 부산은 1951년 인구조사에서 130만이 사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몰려든 귀환동포와 피난민들은 항구에 가까이 있는 40계단 근처에 주로 모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40계단 앞에선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자주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50년대 40계단 앞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전쟁은 아이들도 힘들게 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물부족 문제를 끄집어낸 MBC의 '단비'를 생각나게 합니다.




40계단 바로 앞에 있는 뻥튀기 아저씨. 80년대까지도 쉽게 볼 수 있었던 장면입니다.




지금은 중년을 넘었을 아이들.




그리고 90년대, 40계단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다시 무대에 등장합니다. 40계단이 빈곤서 문화의 코드로 거듭났습니다.




40계단 앞 중앙동은 참 놀라운 땅입니다. 생긴지 100년도 안된 이 땅이 한국 근대사 백년의 주요 무대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일제가 조선 수탈의 기지로 이 땅을 활용했고 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이 땅을 토대로 살았고 70년대 경제의 시대엔 수출 항구로 역할했습니다.  




시대를 받아낸 이 땅엔 역사의 나이테가 느껴집니다. 나무 전봇대가 건물들과 어울릴 정도로. 




가끔은 피난시절을 연상시키는 장터도 잠시 펼쳐집니다. 장터 속의 모자상이 어울립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매축한 이땅을 완전히 떠나진 않았더군요. 40계단 입구에 일본 최고의 자동차 회사 도요다 매장이 주변의 다른 건물들을 압도하는 위용을 자랑합니다. 렉서스에 눈길을 두지 않고는 이 40계단 앞을 들어가기 힘듭니다.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40계단 앞에서 백년의 역사를 느껴보십시오. 조금 더 음미하고 싶으면 소라계단 위의 40계단 문화관을 한 번 들려보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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