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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주제로한 블로그 수필을 이어받았다. 나이를 주제로 무엇을 쓸까? 앞서 쓰신 까시님과 청석님의 글을 살펴봤다. 까시님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언제 느끼시나요?"를 썼고 청석님은 60대 보수주의자로서 소통애로에 대해 쓰셨다.(블로그와 나이)  나는 내 나이를 정치적으로 들여다볼까 한다. 이 세상에 나온 후 새겨진 정치적 나이테를 10년 단위로 들여다보려 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정치블로거인가 봐. 뭘해도 정치로 읽으니.




나는 1968년에 태어났다. 그 해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 중 가장 많이 소환되는 것은 68혁명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탄생한 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한다. 45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해방돌이란 말을 듣고 자랐다. 68년 생들은 도서관 등에서 68혁명을 읽고 스스로 혁명아구나 했을지 모른다. 그런 연관들은 68년생의 가치관에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 중 그해 년도로 기억되는 사건은 별로 없다. 보통은 날짜가 사건을 상징한다. 68혁명은 년도가 상징하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이다.(년도로 상징되는 사건이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유일한 사건?) 따라서 68 혁명은 68년 생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1978년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이때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있었다. 산수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이 문제를 내고선 아는 사람 손을 들라고 했다. 내가 왜 손을 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쨌든 앞에 나갔고 문제는 풀지 못했다. 그리고 내 뇌리에 생생히 박힌 사건이 바로 직후 벌어졌다. 선생님이 내 귀싸대기를 몇 차례 있는 힘껏 후려친 것이다. 너무나 분했다. 어린 마음에도 문제 하나 틀린 게 귀싸대기를 맞을 일인가 싶은 의문이 분명 들었다. 그날 이후로 시험공부만 했다. 그리고 그 달 시험에서 5 등 안에 들었다. 그때 진보상을 받은 것이다.

이때 나는 어렸지만 몇가지를 터득한 것 같다. 사람은 무시 당해선 안된다는 것과 열심히 하면 가능하다는 것을 배운 것 같다. 그때 선생님이 진짜 고맙다.




또 다른 10년 뒤 나는 대학 1학년이 되어 있었다.(재수했다) 그 해엔 올림픽이 있었다. 올림픽으로 나라 전체가 들썩였다. 그러나 내가 그 해에 떠올리게 되는 건 올림픽이 아니라 신문이다. 




바로 한겨레다. 한겨레는 1988년 5월15일 창간했다. 내부에서 너무나 많은 질문이 쏟아졌던 20대 초반, 나는 아버지가 보시는 조선일보에선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은 사설을 읽으면 논리적인 글쓰기가 된다고 하는데 내가 읽어본 조중동의 사설은 아무 감흥이 없었다. 감흥이 없으니 그 안에 논리가 있더라도 흡수되지 않았다. 그 나이에도 그들의 기사가 하나마한 뻔한 소리라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한겨레신문을 읽고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고민하던 것의 해답을 한겨레신문 기사 몇줄에서 찾았던 것이다. 88년의 한겨레는 21살의 나에게 깨달음의 보고였다. 지금 일년에 몇번 나오지 않는 깨달음의 탄성이 당시엔 하루치 신문을 읽으면서 연달아 쏟아졌다. 읽고 또 읽었다. 버리기 아까워 집 장농에 몇년을 쌓아두고 심심하면 줄친 부분을 꺼내 읽기도 했다. 한겨레신문을 집앞 수퍼에서 사봤는데 사고로 안 나오는 날엔 하루종일 똥마려운 사람처럼 어쩔줄 몰라했고 부산 시내 수퍼를 이잡듯이 뒤졌다. 

내 나이 21살에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것은 내게 정마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98년으로 기억이 난다. 그때 집에 초고속통신망을 깔았다. 당시 우리 부서 직원 중 최초로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해서 다른 직원들이 어떻게 신청하느냐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전엔 인터넷이나 피시통신을 몰랐다. 인터넷을 본격적으로 알게 된 건 두루넷을 깔고난 후부터다. 이때부터 알바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놀려먹을 땐 속이 후련하고 욕설 답을 받을 땐 온몸이 피가 솓구쳤다. 이때 상대의 논리허점을 파고드는 방법, 약 올리는 방법, 단수 놓는 방법 등 댓글러 모든 기교를 공부했다. 하기야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밥을 컴 앞에서 먹으면서 멀티로 뛰니 어찌 배우지 않을 수 있겠나.

옆에서 왜 스타크래프트도 하지 않으면서 컴 앞에 그렇게 오래 붙어있느냐고 묻곤 했다. 근데 내겐 이게 스타크래프트보다 더 재밌는 게임이었다. 스타크래프트는 상대의 게임 캐릭터를 박살 내는 거지만 이건 존재 간의 승부로서 더 짜릿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스타크래프트처럼 프로그램 구매나 내기 등의 게임비를 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게임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10년 뒤 그걸 알게 되었다.




2008년 4월 경인가 나에게 날아온 법원의 통지서다. 여기에 게임비가 청구되어 있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너무 과도한 액션을 했다는 게 이유였다. 게임비가 비싼 걸 알고나니 요즘은 좀 자제하게 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이게 10년 단위로 본 나의 정치적 나이테다. 역사적 사건이 새겨진 년도에 태어나 10년 뒤 사람은 무시당해선 안된다는 걸 배우고 그 10년 뒤 나의 인문학적 질문에 답할 좋은 신문을 만나고 다시 10년 뒤 내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공간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10년 뒤엔 게임비라도 작은 좌절도 맛본다. 앞으로 10년 뒤에는 어떤 나이테가 새겨질까? 좋아지길 빌어본다.   

다음 릴레이는 고블로그 파비님께 부탁드립니다.  받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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