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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대학 졸업반 취업용 토익을 공부할 때 간혹 듣던 말이다. 선배나 강사가 이 말을 해줄 때면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 말에 대한 확신과 그럴듯한 언어를 쓴 후의 뿌듯함이 배어 있는 표정이었다. 나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호응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의 말대로 영어는 수단일뿐이다. 영어는 잘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잘 써먹어야 하는 것이다. 영어를 아무리 잘 해도 쓸 데가 없거나 잘 못쓰면 무용지물이다. 언론이 칭찬하는 이명박식 영어처럼 문법이나 억양이 좀 틀려도 상대와의 소통에 문제가 없다면 수단으로서의 영어를 제대로 써먹는 것이다.

영어를 잘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영어를 잘 쓰는 게 목적이라면 모든 국민이 영어를 잘 할 필요는 없다. 영어라는 수단이 필요한 사람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봐도 영어를 못해 업무에 곤란을 겪는 사람은 많지않다. 어쩌면 업무상 영어가 필요한 사람보다 영어를 가르쳐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영어라는 수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필요유무를 가리지 않고 모든 학생에게 강도 높은 영어교육을 시키는 것은 사회적 자원의 낭비일 수 있다. 모두 잘하면 나쁠 건 없지만 모두 잘하기 위해 너무나 큰 비용과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학생이나 우리 자신이 유창한 영어를 못하는 것을 교육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수학을 10년 이상 배웠지만 지금 당장 수학책의 연습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자리에서 수학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교육이 잘못 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외국인과 맞닥뜨렸을 때 유창하게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것이 잘못된 교육의 증거는 아니다.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익히지 않는 한 배운 것을 즉각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운 것은 어떤 학문이라도 마찬가지다.

교육은 즉각적 활용능력보다는 지속적인 학습능력을 준비하는 것이다.(그래서 대학입학시험 제목이 수학능력 시험이다.) 필요한 정보를 찾고 접근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지 그 자리에서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수학문제가 어떤 종류의 문제이고 요구하는 공식이 무엇이고 그 공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고만 있다면 교육은 성공한 것이다. 영어가 필요한 경우 영어를 즉각적으로 써먹으면 좋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라도 필요한 상황과 쓰임새에 따라 스스로 학습해서 대처할 수 있다면 그것도 성공한 영어교육이라 볼 수 있다.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학습이 중요한 언어교육에서 공교육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영어 외에 다른 교과목도 가르쳐야하는 학교가 하루에 한시간도 안돼는 영어수업으로 사교육이 필요없을 정도의 영어교육을 제공하겠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공교육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언제든지 수학을 풀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쓸데 없는 짓이고 공교육의 목표가 되서도 안된다. 언제든지 외국인과 자유자재로 대화할수 있는 영어실력을 국민이 갖추면 좋겠지만 그건 공교육의 능력과 범위를 벗어난 일이다. 이런 능력을 위해 공교육이 엄청난 시간과 예산을 쏟아붓는 것은 비효율적인 짓이다. 교육은 적절한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고급영어가 정보접근성을 높여 국민들의 국제경쟁력을 높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래도 최신의 사상이나 고급정보는 영어로 쓰이는 게 많은데 한국민이 영어를 잘하면 이런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져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가질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고급정보가 영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에 많긴 하지만 불어나 중국어 일어에도 유용한 정보들이 있다. 국민들이 영어에 편중된 정보만 취해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영미중심의 사고에 고착될 수 있다. 차라리 전문적인 영어번역자를 국비로 수천명 교육시켜 미국의 고급정보를  한글정보로 번역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이렇게 되면 한글정보의 경쟁력도 커지고 한글도 발전할 것이다.

인수위는 사교육시장에 안몰리도록 공교육이 영어를 책임지겠다고 한다. 참 답답한 소리다. 사교육시장에 학생들이 몰리는 것은 영어수업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한국교육의 문제는 실력부족이 아니라 과도한 경쟁환경이다. 영어수업을 늘인다고 영어사교육이 없어질거라는 생각은 환상에 가깝다. 몰입교육은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늘릴진 모르나 경쟁환경을 완화시키진 않는다. 대학이 서열화 되어있는 입시환경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영어실력이 아니라 영어순위다. 치열한 경쟁이 있는 한 사교육시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공교육의 영어교육 강화는 경쟁의 발판만 높이고 그렇게 높아진 경쟁발판으로 인해 영어사교육가격은 더올라갈 수 있다.

인수위에게 지금 영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되었다. 영어를 목적화 해버리니까 교육목표에 한계가 없어졌다. 이러니 영어에 올인하는 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문제는 공교육과 사교육의 경쟁으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다. 경쟁환경 완화에서 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수위 이제 그만 떼쓰고 영어를 수단의 자리로 되돌려 놓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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