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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길 전 장관이 쓴 책입니다. 김정길 전 장관은 88년 3당 합당에 반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당에 함께 남아 지역주의 반대에 앞장섰던 대표적 정치인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에는 정무수석과 행자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김정길 전 장관이 1981년에 쓴 책으로 부산대 재학시절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과정과 구속까지 당했던 학생운동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김정길 전 장관도 한 권 밖에 없다는 이 책을 빌려온 건 책에서 얼핏 본 총학생회장 선거 과정이 흥미로워 더 읽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 정치에 대한 의지

한번 옳다고 믿고 작심한 일을, 한번 해야겠다고 맘먹었던 일을 끝내 이루지 못하면, 그것이 마치 불치의 병처럼 평생 동안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야망을 갖고 싶었다. 남해안의 파도가 주는 거친 꿈을, 짠물을 묻혀오던 해풍이 주는 생에의 끝없는 도전을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24p)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김정길 전 장관의 총학생회장에 대한 의지입니다. 김정길 전 장관이 총학생회장 선거에 뛰어든 1970년은 김정길 전 장관이 부산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해입니다. 졸업생이 어떻게 총학생회장이 되었을까요? 김정길 전 장관은 졸업과 동시에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에 편입합니다. 그에 대해 학생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림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나 김정길 전 장관은 여기에 대해 별 다른 변명을 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거창한 자신의 목표를 보여주는 걸로 대신합니다. 김장관의 결연한 의지가 총학생회장이 아니라 대권에 출마한 분위기입니다. 


2. 단일화

그렇게 해서 총학출마 의지를 감추지 않았던 김정길 전 장관에게 첫번째 장벽은 같은 과에서 나왔습니다. 같은 단대 같은 반의 k군도 총학생회장 출마에 나선 것입니다. k군은 여러모로 껄끄러운 상대였습니다. k군도 서울의 Y대를 다니다 총학생회장 출마를 위해 부산대학교에 편입한 학생으로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게다가 k군은 김정길 전 장관의 고등학교 후배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만만히 물러서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드디어는 둘 중 하나를 선정하는 것을 과투표에서 부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즉 과내 전학생이 투표를 하여그 결과에 승복하기로 한다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 의견에 찬성했다. 둘 다 모두 나름대로의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29P)


같은 과에서 두 명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정치학의 지배적 여론이었습니다. 결국 정치학과 학우들이 도출한 방안은 단일화였습니다. 김정길 전 장관과 K군 둘 다 단일화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투표 결과 김정길 전 장관이 6표차로 승리했습니다. 총 12명이 투표했는데 9명이 김정길 전 장관에게 표를 주고 3명이 K군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단일화는 아쉽게도 완성되진 못했습니다. 패배한 K군이 승복하지 못하고 출마를 선언해버렸습니다.


3. 삼고초려


김해에 있는 어느 절간을 찾아가는 길은 무덥고 고통스러웠다. 우리는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누군가 내가 Y군을 찾아가는 것을 <삼고초려>라 해서 웃었지만, 정말 유비 현덕이 제갈공명을 찾아가는 심정이었다.(31P)


단일화에 이기고도 그 성과를 챙기지 못했던 김정길 정 장관은 한 과에 두명이 출마한다는 부담을 안은 채 어쨌든 총학생회장 선거를 준비합니다. 선거는 사람 싸움입니다. 누가 더 많은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냐에 따라 승패가 달렸습니다. 김정길 전 장관은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만나러 다닙니다. 때로는 무더운 한여름 깊은 절간에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땀이 범벅이 되어 찾아 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찾아간 y군은 김정길 전 장관의 청을 승낙했다고 합니다.


4. 조직잡기


상과대학의 J군은 역시 그의 출신교인 부산고등학교 동문회를 업고 한덩어리가 되어 강한 조직을 형성해 가고 있다고 들렸다. 물론 나와 과투표에서 대결해 패한 같은 과의 K군도 나에 못지않게 동문회를 이용하는 등 대단한 세력분포를 이루면서 선거 준비의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문리과대학의 J군 역시 문리대의 단일 후보로서 그들대로 승산을 걸고 있었다.(33P)


정계의 선거와 마찬가지로 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도 조직싸움이 치열합니다. 학교 내 조직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인 동문회를 잡기 위해 각 후보들은 치열한 세싸움을 벌입니다. 김정길 전 장관도 자신의 출신교인 동아고등학교와 마산고등학교 동문회의 지지를 다짐받습니다. 각 단대와 서클 등에서도 조직잡기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5. 극적인 당선 


이겼다 이겼어. 그러나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보고가 들어왔다. 단, 한표 차이로 내가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어렴프시 당선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중에 최종적으로 확인된 결과는 겨우 9표 차이의 신승이었다. 9월9일9시에 시작된 투표에서 9표 차이로 이긴 것이다. 행운의 9. 갑오라도 좋고, 나인 포카드라도 상관없었다.


선거결과 김정길 전 장관은 9표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 김정길 전 장관에 의하면 거의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고 합니다. 같은 동문 같은 과에서 k군이 출마하고도 거둔 당선이라 김정길 전 장관은 더욱 감격스러웠다고 합니다.


정치가 동력이다

정치권 선거만큼이나 뜨거운 열기, 단일화나 세력연합 등 정치권에서 볼 수 있는 정치 기법, 39년 전 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의 모습은 오늘날 정치권 선거 못지 않습니다. 요즘의 미지근한 총학생회장 선거만 봐온 지금 대학생들에겐 이 모습들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학생들이 너무 정치적이라며 비판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치가 넘쳐났던 70년대의 대학생들이 바로 이 나라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정치적이었던 그들은 사회에 나아가 그 정치적 활력을 그대로 불어넣었습니다. 

정치가 부재한 대학을 다니는 지금의 대학생들을 보면 이들이 앞으로 어떤 사회적 동력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사회적 동력은 정치에 있습니다. 정치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사회의 기계적 구성원으로만 자리매김할 뿐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적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동력의 자질입니다. 그런 점에서 적극적으로 정치하고 표현했던 70년대의 대학생들이 더 대학생 답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39년 전 김정길 전 장관이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내건 슬로건이 지역감정 해소라는 것입니다. 김정길 전 장관의 지역주의 반대 소신이 이미 39년 전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9표라는 갑오의 행운을 가졌던 김정길 전 장관도 박정희정권의 탄압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신을 앞두고 미리 정지작업을 벌이던 박정희정권에 의해 김정길 전 장관은 1년 뒤인 71년 10월 데모 주동 혐의로 구속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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