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학살 유족들, 부모·형제 묘비 이제는 지키겠다

제주도 모슬포에 '백조일손지묘'라는 4.3 유적지가 있습니다. '백조일손'은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란 뜻입니다. 4.3 당시 이 지역에서 학살된 사람 149명의 유해를 수습했는데 학살되고 수년이 지나서 대부분의 유해가 구별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확인할 수 없는 유해 132구를 다 같이 공동 묘역에 안장하면서 백조일손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 묘역의 묘비 바로 옆에는 돌 조각이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돌 조각은 과거 묘비의 파편입니다. 132명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1959년 묘비를 만들었는데 1961년 6월 15일 5.16 쿠데타세력이 이 묘비를 덩어리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해 버렸습니다. 잔인하게 학살 당하고도 수년 동안 땅에 묻혀 수습되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군사정권은 묘비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3월 초 한나라당 권경석의원이 ‘진실화해위원회를 포함한 17개 과거사관련위원회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이 개정안은 과거사관련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대해 국무총리가 재심 및 소송요청권을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권 의원측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적대시하는 反체제 혁명단체의 관련자를 민주화 운동자로 인정"되는 것을 우려하여 이 개정안을 내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권의원이 발의한 법이 통과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2009년 대한민국에 마녀사냥이 시작되게 됩니다. 반공단체 등에선 학살된 사람이 좌익단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을 제기할 것이고 좌익이니 죽어도 마땅하다는 논리를 펼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희생자는 명예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빨갱이 사냥에 의해 오명을 덮어 쓸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좌익이면 죽어도 된다는 졸렬한 논리가 판치는 야만의 사회가 될 것입니다.

다시 제주도의 백조일손묘역입니다. 이 묘비는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묘비가 파괴되고 32년 뒤 문민정부에서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묘비의 맨 위에 태극기와 무궁화가 올려져 있습니다. 백조일손의 132명 희생자들은 국가에 의해서 학살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죽인 국가를 죽어서도 떠받들다니요. 대한민국에서 국가가 종교입니까? 이 나라가 국가를 위한 가미가제를 떠받드는 국가지상주의 나라입니까?

묘역을 안내해준 시민단체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묘비의 태극기와 무궁화는 유족들의 뜻이었다고 합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결국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해할만 합니다. 93년이면 문민정부라해도  군사정권에서 벗어난지 5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4.19 후에 피학살자 진상규명을 주도하던 대구의 한 유족은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사형을 구형당하기도 했습니다. 48년 전 백조일손의 묘비가 파괴되는 걸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태극기와 무궁화가 있으면 다시 정권이 바뀌더라도 파괴 당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경남 창원의 한나라당 권경석의원 사무실 앞입니다. 2009년 4월25일 이곳에 전국에서 찾아온 70여명의 피학살자 유족들이 모였습니다. 유족들은 이 자리에서 진실화해위원회 개정안을 발의한 권경석의원과 한나라당을 강하게 성토했습니다. 한 유족은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무산시킨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한나라당의 이런 시도를 유족들이 목숨 걸고 막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또 다른 유족은 선친이 인민군에게 보리쌀 두 되를 준 것 때문에 부역죄로 몰려 죽었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4월 25일 창원에 전국에서 모인 피학살자 유족들은 60 여년 전 부모·형제가 학살 당하는 것을 두려움에 떨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유족들이 아닙니다. 48년 전 부모·형제의 묘비가 파괴되는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유족들이 아닙니다. 이제 그들이 나섰습니다. 자신들의 부모·형제를 두번 죽이는 일을 이제는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48년 전처럼 묘비가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법의 묘비, 명예의 묘비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

수십년이 지난 뒤 묘역 앞에 깨진 묘비가 전시되는 건 이제 보고싶지 않습니다. 유족들의 묘비가 이번에는 꼭 지켜지길 바랍니다.


전국 노인 70여명이 창원으로 몰려온 이유(김주완기자)

노인집회 두려워하는 한나라당, 뭔짓했기에?(발칙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