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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하철엔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노조가 있다. 바로 지하철 청소용역노동자들로 구성된 부산공공서비스노조다. 이 노조가 모임을 가지기 위해 모이는 걸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머리에서 많은 궁금증들이 떠올랐다. 여성들은 어떻게 조직을 만들고 이끌어나갈까? 대부분 50대가 넘는 중년여성들은 과연 노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중년의 여성들이 모여 투쟁과 조직화 등의 노조용어를 써가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 자체가 낯설고 좀 신기한 장면일 것이다. 이 궁금증을 풀기위해 2009년 2월 부산공공서비스노조의 조선자지부장을 만났다. 부산공공서비스노조원들의 얘기에서 한국의 진보정치가 귀담아 들을만한 내용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입사하기 전부터 노조 이런 데 관심이 있었습니까.

 

(조선자지부장 이하 생략)그 전에는 나도 이런 거 몰랐습니다. 여기 들어와서 알았죠. 2001년 3월에 입사했는데 그때도 노조하자는 말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현장에서는 그럴 엄두도 못냈습니다. 진짜로 시작해보자 해가지고 된 게 2003년이었는데 그때 여성연맹에서 나서주고 부산지하철노조에서도 도와주면서 노조가 된 거죠.

여성연맹에서 부산지하철 청소용역 노동자 조직화 사업을 시작한 것은 2003년이었다. 여성연맹은 2003년 2월 설 연휴에 17명의 조합원 가입을 이끌어냈고, 이 인원으로 부산지하철 청소용역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이후 업체들과의 협상을 통해 노조활동 보장과 전임자 1명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당시 업체와 단협이 비교적 어렵지 않게 체결될 수 있었던 것은 최저임금법위반에 대한 진정서로 업체를 압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하철에서는 서울, 대구, 인천의 지하철청소용역 노조가 여성연맹 소속이다.

위원장엔 어떻게 나서시게 된 겁니까?

내가 초대위원장은 아니었어요. 처음 노조가 설립된 게 2003년 2월이었는데 그 때 열 몇 명이 노조 가입하고 좌천역에 계신 한 분을 노조위원장으로 해서 신고했거든요. 설립되고 첫 단협을 통해서 노조 전임직을 하나 땄는데 암만 해도 전임을 한다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가 내한테 왔더라구요. 3월 말 경엔가 노조 가입하고 2003년도 5월 10일부터 전임 노조위원장을 했죠.

처음 전임 위원장으로 활동하시면서 어떠셨습니까? 고충도 많았을텐데.

사무국장님이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사무국장) 지금은 많이 나아졌는데 초창기 땐 엄청 탄압받았어요. 그걸 옆에서 보고 탈퇴한 사람들도 많았죠. 노조 처음 가입한 17명도 다 탈퇴했을 정도니깐요. 저는 반장들하고 싸움도 많이 했어요. 제가 분임장인데 2003년 노조 결성해서 보니 분임장 39명 중 노조원이 저 한 명인거예요. 저한테 뭐 시켜줄테니 탈퇴하라고 회유도 들어오고 그랬죠.

(조선자) 초창기에 회사에는 공개 안하고 조합비는 보내주는 비공개 조합원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한테 계좌번호 추적한다 했어요. 그래서 내가 "느그가 수사원이가?" 하면서 싸움도 많이 했습니다. 같은 직원한테도 당하고 그랬습니다. 역 게시판에 노조소식지 붙이는데 벽에다 누가 물을 쫘악 들이다 붓더라구요. 그래서 그때 사무국장하던 천**한테 빨리 매점 가서 1회용 카메라 사서 사진 찍으라고 했죠. 그러니까 나중에는 "붙이도 됩니다" 그러더라구요. 그런 거 많았습니다. 같은 직원한테 욕도 많이 듣고. 문도 안 열어주는 데 천지였습니다. 문 살짝 열었다가 우리가 보이면 그냥 가라 그럽니다.

같은 동료직원들이 왜 그랬죠?

그 때 왜냐면 노동조합이 생기면 회사 무너진다 그렇게 교육했습니다. 자기들 짤릴 거라고 겁먹은 거죠. 짤리기 싫으니까 그렇게 한 거죠.

최초 17명에서 시작하셨는데, 현재 조합원은 얼마나 늘었습니까?

3개 호선 모두 노조가입률 60% 씩 넘었습니다. 1호선은 가입률이 90%나 되고요. 3호선도 함 싸우고 나니까 많이 늘었죠.

가족이나 아는 분들은 노조 일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걱정 안합니까?

남매 둘인데 둘 다 장가가고 시집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지금 활동이 좀 자유롭죠. 내가 이 일 한다니까 우리 사위가 가입은 하고 나서고 그러지는 말라고 그럽니다. 지금은 아무 말 안합니다. 잘 모를걸요. 친구들은 내가 이거 한다니까 "야 느그 그래 인물이 없나?"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이 일을 하니까 개인 생활이 없어집니다. 이젠 그 친구들도 연락이 잘 안옵니다. 집 직장 집 사무실 이거 뿐입니다. 현장에 일나면 현장이 우선이고. 가정은 뭐 신경 쓸 게 없으니 자연 현장에 집중은 되는 거죠.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내가 지금 60이 넘었는데 사람들한테는 아직도 50이라고 뻥칩니다(웃음). 처음 입사했을 때 지하철 간부 한 명이 내보고 47 아니냐고 해요. 그때가 54살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앞으로 내가 47하께." 그랬었죠(웃음).

정말 조선자지부장은 50대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그에게서 넘쳐나는 에너지가 그를 60이상으로 넘겨짚기 힘들게 했다.

노동조합하고 나서 어떤 성과가 있었습니까.

 처음에 들어와 보니까 수령액이 40만원 정도였습니다. 심하게 쓰는 사람은 용돈밖에 안되죠. 지금은 노동조합 하는 바람에 그때보다 임금이 좋아졌죠. 옛날보다 좋아졌다는 걸 아는 게 옛날에 임금 작을 때는 막 나가고 들어오고 그랬는데 지금은 잘 안나갑니다. 우리가 정년도 보장해놨습니다. 만 63세 이상이거든요. 정년을 높이니까 나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은 30대 후반도 들어오고 그럽니다. 그라고 많이 받으면 겁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짤릴까봐 그러는 거죠.

조합원들에게 정치적인 변화는 없었습니까.

아줌마들도 인자 민노당 많이 찍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민노당이 두 당으로 갈라지고 그래 되니까 이거 설명하기 참 곤란했습니다. 노동자는 뭉쳐야 된다고 했는데 갈라지니까 뭐라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저분들은 누구죠?

조선자지부장 뒤로 벽에 십수명의 명단과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운영위원들입니다.

운영위원들 모이시면 어떤 얘길 합니까.

주로 우리 현장 활동 한 거 얘기하고 조합원들 근무환경 불만 같은 거 듣죠. 어떤 아줌마가 어디로 갔다는 등의 인사이동에 대한 얘기도 하고. 또 생활하면서 서로 싸운 것도 얘기합니다(웃음). 

아까 3호선에서 투쟁한 것 때문에 조합원이 늘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투쟁 말씀하시는 거죠?

그게 2006년 11월이지. 부산에서 대단했습니다. 여성단체에서도 같이 나서고. 3호선 업체 회장이 밤마다 분임장들 불러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내일 출근해서 가야 된다 그라면 내일 니 나오지 마라 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공사에 항의하고 업체를 바꾸라고해서 업체가 바뀌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당연히 고용은 승계된다고 봤는데 새로 온 업체가 사건 관련된 아줌마들 고용을 승계 안시키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 업체를 서면에서 만났는데 이 사람들이 절대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투쟁하겠다 그러니까 “아줌마 영화 실미도 봤어요? 가스통 들고 갑니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어 들고온나 라이타 준비해가 있으께.” 그랬지요.

정말 해고되었나요.

진짜로 17명이 해고가 다 되어버렸어요. 회의하면서 내가 그랬습니다. "이거는 공사로비를 점거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눈치 못 채도록 퇴근하는 조부터 몇 사람 씩 들어가자." 그래서 해고된 사람들 모두 공사로비 점거 들어갔습니다. 처음에 열 몇 명이었는데, 그 이튿날 40명, 다음날 백명 막 이렇게 점거투쟁 동참자가 늘어났습니다. 거기서 열 하루 있었죠.

점거하면서 어떤 투쟁을 했습니까?

우리가 페트병 계속 두드렸습니다. 낮에 음악 틀어놓고 계속 두드렸죠. 집에 딱 한 번 옷만 갈아입고 거서 계속 묵고 자고 했습니다. 6월25일 들어가서 7월 5일날 나왔으니까 11일만에 타결되었죠.

생각나는 다른 투쟁 있습니까?

장산역에 조합원이 해고 될뻔해서 출근 투쟁했던 것도 있습니다. 그 조합원이 오전 6시까지 출근하는 조였거든요. 내가 집이 화명동인데 그때 오전 4시에 일어나서 6시까지 장산으로 출근했습니다. 그때부터 오후 2시까지 피켓 들고 서서 23일 동안 싸웠습니다. 지금 그 조합원 서면에 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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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조선자지부장의 "가스통 들고온나 라이타 준비해가 있으께"란 말이 머리 속에 계속 떠올랐다. 근래 들어본 말 중에서 가장 후련한 말이었다. 조선자지부장이 노동운동계의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와 땀이 묻은 이런 시어는 현장에서 몸으로 치열하게 투쟁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말할 수 없는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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