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오거돈 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건 2004년 부산시장 보궐선거 출마였다. 2003년 안상영 부산시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면서 행정부시장이었던 오거돈이 시장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오거돈은 권한대행 7개월 동안 태풍 매미와 화물연대파업을 잘 대처하고 APEC 부산유치라는 쾌거도 이루었다. 행정력과 정치력을 검증받은 오거돈은 차기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결국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시장선거에 나섰다.

 

그러나 부산시장 출마 정도로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기억하진 않는다. 이름표만 걸었던 오거돈이라는 세글자는 2005년 국정감사를 통해 국민들에게 각인되었다. 국정감사장에서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이 당시 해수부 장관이었던 오거돈의 답변을 두고 "장관이 답변을 느릿느릿하게 하는 부분은 (질의시간에서) 빼주세요"라며 말더듬증을 비꼬는 인신공격을 했는데 이 사건은 즉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말더듬증을 겪고 있는 오거돈에겐 격려가 쏟아지고 오거돈을 비하한 이상배에겐 비난이 쇄도한 것이다. 

 

사람들은 장관의 말더듬증을 허물로 보지 않았다. 그보다 말더듬증을 극복하고 장관이란 자리에까지 올라간 것에 더 놀라워 했다. 중증장애에 비하면 말더듬증은 사소한 장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전달력과 리더쉽이 필요한 공직이나 정치에선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절제되고 세련된 화법이 필요한 분야에서 말더듬증을 극복하고 장관이 되었다는 점이 사람들에게 더 인정받은 것이다.

 

장애를 비하한 한 정치인의 혼내기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은 한 네티즌이 오거돈이 해수부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를 찾아내 알리면서 감동까지 보탰다. 같은 해 장애인의 날 오거돈은 '나는 장애인입니다'라는 편지를 해수부 직원들에게 썼다. 이 편지에서 오거돈은 자신이 말더듬증이 있음을 고백하고 소통과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다. 장관이 자신의 장애마저도 소통하고 그를 통해 직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모습은 장애를 비하한  정치인의 모습과 더욱 대비되면서 이 사건을 완결성 있는 스토리로 만들어 버렸다.

 

언제부터 말을 더듬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오거돈이 말더듬증을 콤플렉스로 느끼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말더듬하며 책을 읽다 선생님에게 "됐다"는 말을 듣고는 수업이 끝난 후 뒷산에서 울었던 일은 오거돈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그러나 오거돈은 말더듬증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진 않았다. 어린 오거돈은 컴플렉스를 싸움으로 이겨냈다. 작은 키였지만 다부졌던 오거돈을 아이들은 놀릴 수가 없었다. 아마 말더듬 컴플렉스가 오거돈에게 더 주먹을 단단히 쥐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정도의 극복이라면 오거돈은 강한 사내아이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장애의 극복은 혼자만으로는 할 수 없다. 오거돈이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건 주변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거돈이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보살핌은 초등학교 때 음악을 가르친 정성희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오거돈의 노래를 칭찬했다. 선생님의 칭찬으로 오거돈은 합창단에 가입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합창대회에서 일등상이라는 것도 타보게 되었다. 내성적 성격이 밝아졌고 자연 싸움판도 멀리하게 되었다. 스스로도 달라지기로 맘을 먹었다.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손을 들어 발표했고 그렇게 하다보니 성적도 올라가 5학년 때는 반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이때 올라간 성적은 계속 유지되어 오거돈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오거돈 집안의 열 형제도 알게 모르게 말더듬증 극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오거돈은 10형제 중 넷째다. 과거 자식이 10명인 집안이 적지 않았지만 오거돈 집안의 자식 10명은 특이했다. 10명 모두 아들이었던 것이다. 오거돈은 10형제의 집안에서 단련이 되었다. 그리고 10 형제는 오거돈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혀줬다. 오거돈은 말은 더듬었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런 여유가 말더듬증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오거돈은 행정고시 4등의 성적으로 공직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오거돈의 말더듬증은 한번 더 벽에 부딪히게 된다. 세련된 화법과 프리젠테이션이 필요한 고위공직세계는 어느 정도의 말더듬증 극복으로 통하지 않았다. 내무부에서 전산지도계장으로 토지대장전산화작업을 맡을 땐 상사들이 내용을 어려워해 오거돈이 직접 청와대에 보고하기도 했다. 공직생활을 시작하면서 오거돈은 신문사설을 아침마다 큰 소리로 읽고 목소리를 녹음해 직접 들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노력의 결과 오거돈의 공직생활을 화려했다. 급기야 98년 한국일보가 발표한 차세대리더 5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오거돈은 해군장교 훈련병 시절 아름다운 한 여인에게 프로포즈했고 임관 무렵에 결혼했다. 오거돈의 말더듬증이 연애에 지장을 줬을 법한데 오거돈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돌파했을까? 오거돈은 노래로 아내의 맘을 사로잡았다. 아내는 공무원 연수원 파티에 파트너로 만났다. 파티가 끝나고 나오면서 오거돈은 자신이 아는 감미로운 노래들은 몽땅 불러제꼈다. 그러자 어느새 아내가 감동적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연애시절 오거돈은 이야기보다 노래를 더 많이 했다고 한다.

 

 

 

 

방송인 이상벽씨는 오거돈의 말더듬증에 대해 아주 인상적인 말을 했다. 오거돈의 말투에서 탱크소리가 난다고 했다. 

 

"ok의 말투 속에선 탱크소리가 난다. 박자개념이라곤 없지만 목표를 향해 표표히 돌진하는 그의 말 속에서 나는 ok만의 진면목을 발견하곤 한다. 말의 표피적인 호감은 정교함, 유연함, 적당한 속도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그러한 것들보다 진실과 깊이로 규정돼야 한다는 원칙을 ok는 일찌감치 간파했던가 보다."

 

 

먼저 오거돈 말소리에서 탱크를 찾아낸 이상벽씨의 통찰에 감탄한다. 오거돈이 말할 때 보면 영락없는 탱크의 모습이다. 캐터필러처럼 끌고나오는 듯한 오거돈의 말투에선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탱크의 무한궤도가 땅 전체를 밟고 지나가듯 오거돈은 말 하나하나를 다지며 낸다. 그래서 오히려 매끈하고 세련된 말투보다 더 큰 힘과 신뢰감을 느끼게 된다.

 

오거돈의 탱크 같은 말의 힘이 효과를 본 사례가 있다. APEC 부산 개최를 위해 노무현 대통령과 담판하면서 오거돈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부산을 포기하시겠다는 겁니까? 제가 대통령께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한 번 이루어 보겠습니다." 오거돈이 캐터필러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다지며 이 말을 쏟아냈을 때 노무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담판의 효과 덕분인지 부산은 APEC를 유치하게 되었고 오거돈은 부산시장 후보로 나서게 된다.

 

오거돈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해양대학교 총장직을 맡았다. 오거돈의 업적은 이때 더 두드러진다. 오거돈은 재임기간 내 800억원대에 불과하던 대학 재정 규모를 1,600억원대로 2배 가까이 증가시켰다. 2009년부터 3년간 등록금을 동결시켰고 장학금 수혜율은 80%로 부산·경남지역 1위에 올려놓았다. 전임교원 1인당 연구 지원비도 부산·경남지역 1위를 달성했다. 공무원은 자신만의 업적을 가지기 힘들다. 그러나 해양대학교는 오거돈 전과 후가 확실히 달라졌다. 이건 공적 자료들과 학내 여론도 인정하는 점이다. 오거돈이 해양대학교를 탱크처럼 끌고간 것 같다.

 

가장 큰 공부는 아픔이다. 아파본 사람은 이해와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 오거돈의 정체성을 따지는데 말더듬증을 극복한 오거돈을 아픔을 아는 사람이라고 보면 어떨까? 아픔을 안다는 건 약자와 공유할 게 있다는 것이다. 약자와 공유한 사람이 약자를 배반하긴 어렵다. 오거돈이 약자들과 아픔을 공유한다면 그것은 오거돈이 말더듬증을 극복하는데 마지막 한 획이 될 것이다.

 

 

반응형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