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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

 
 

 

대학교 졸업 이후로 버스를 탄적이 별로 없다. 출퇴근은 지하철을 이용하고 좀 먼 곳이나 지하철이 없는 곳은 차를 이용한다. 그러다 몇 년에 한 번 씩 버스를 타게 되는데 그럴 때면 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눈과 가슴이 시렸다. 아이의 손을 끄는 엄마, 주섬주섬 일어서는 할머니, 온갖 간판을 단 가게들은 흔히 볼 수 있는 거리의 풍경이지만, 버스창을 통해서 파노라마처렴 스쳐지나갈 땐 왠지 스크린을 보는 것처럼 집중이 되고 맘은 애틋해졌다.
 
언젠가는 버스여행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뒷좌석에 느긋하게 앉아 종점과 종점 사이의 풍경을 즐기다 맘 내키는 곳엔 내려서 돌아보기도 하는 그런 여행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언젠가'가 아닌 '지금' 실현 시킨 책이 나왔다. 바로 경남도민일보의 김훤주 기자가 쓴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다. 이 책은 김훤주 기자가 일년 동안 경상남도 지역을 버스타고 돌아다닌 여행기다.
 
김훤주 기자의 버스여행은 앞서 말한 버스여행과 조금 다른 점이 있긴하다. 앞의 버스여행이 스크린처럼 펼쳐지는 창밖 풍경에 관심을 가졌다면 김훤주 기자의 버스여행은 자동차와 대비한 버스여행의 자유로움에 꽂혀있다. 책은 우리가 자동차를 두고 버스를 탈 때 만끽할 수 있는 해방감을 자랑하듯 늘어놓는다.
 
버스가 우리에게 주는 해방은 바로 '걷기의 해방'이다. 관광지에 자동차를 가져가면 차량의 접근성을 우선 고려한다. 자동차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내리면 이제 차량과의 근접성을 걱정한다. 차를 두고 멀리 갈 수 없으니 근처만 살피게 된다. 만약 차가 없다면 주차장이 아니라 버스정류장을 찾으면 되기 때문에 이런 걱정을 할 이유가 없다. 온 길을 다시 갈 필요가 없으니 새로운 길들이 열리고 길은 돌아가야할 고단한 길이 아니라 흥미롭고 여유로운 길이 된다.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면 걷기 말고 다른 방법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겠지만, 자가용을 끌고 왔다면 아무리 거닐어도 다시 자가용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하니, 결국 가장 잘 알려진 주남에만 왔다가 잠깐 바람만 쐬고는 휭하니 떠나버리게 되는 겁니다."
 
김훤주 기자는 "걸으면 여러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걷기는 "세상의 모든 것에 아주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하고 "오롯이 자신에게 빠져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며 예찬론을 펼친다. 그러나 김훤주 기자가 걷기에서 가장 많이 얻는 건 ‘술 먹을 기회’, 즉 ‘술의 해방’인 거 같다. 계곡에 발을 넣고 싸간 도시락에 반주 한잔 했다거나 버스를 기다리며 동네가게에서 해산물과 함께 한잔 걸쳤다는 음주 에피소드가 차로 여행 다니는 사람 약올린다 생각이 들 정도로 자주 나온다.
 
"바로 앞에는 이름 없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습니다. 머리 숙이고 들어가 멍게와 개불 1만원 어치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소주는 두어 잔 남았으나 안주가 바닥을 보였겠지요. 그걸 본 주인 아주머니, 말없이 멍게 세 개를 더 썰더니 그냥 들라 했습니다. 멍게가 제철이라 그것만으로도 좋았지만 푸짐한 인심까지 얹히니 더 좋았습니다. 맞은편 시내버스 종점에 가려고 일어나면서 봤더니 2시50분이 넘어 있었습니다."
 
참 정감있고 입맛 다시게 하는 풍경이다. 호젓하게 서너 시간 길을 걷고 낯선 곳에서 지역의 제철 음식과 한잔하는 기분은 어떨까? 이 장면에서 걷기 여행의 최고 매력을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차체야 흔들리든 말든 버스 좌석에 몸을 맡긴 채 돌아왔다는 자유로움의 극치같은 얘기까지 읽고나면 다음날 당장 배낭을 하나 메고 버스에 올라타고 싶어진다.
 

▲ 책엔 길 사진이 많이 나온다. 오른쪽 아래 사진은 저자 뒷모습.

 
버스여행에선 버스도 풍경이다. 특히나 손님 대부분이 노인인 시골버스의 오래되고 느린 시간 위엔 풍경이 잘 그려진다. 여기엔 이 느린 시간에 동화된 버스기사가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정시에 떠나지 않던 버스기사는 약속한 것처럼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다른 버스는 노선에도 없는 길로 꽤 올라가 할머니를 한분 태우고 다시 내려온다. 김훤주 기자가 "이렇게 즐거운 버스는 난생 처음"이라며 소개하는 버스는 풍경 중에 풍경이다.
 
"달리다 아예 시동을 끄고 내리기도 했습니다. 새우 양식장인데 아는 집인가 봅니다. "가서요, 내 커피 좀 뽑아 오께요." 좀 있다 돌아오는 기사 양손에는 자판기 커피가 한 잔씩 들려 있습니다. "마이 뽑아 올라 캤는데 기계가 딱 엥꼬가 났다" 한잔은 자기가 마시고 나머지 한 잔은 뒤에 앉은 할머니 한 분에게 건냅니다. 그 커피는 이리저리 돌다가 앞에서 오른쪽 두 번째 자리에 앉은 할머니에게 가서 정착했습니다."
 
보통의 여행은 얼마의 거리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고, 가격이 어떤지 알려주는 3개의 숫자만 있으면 여행을 구성할 수 있다. 버스여행은 여기에 하나의 숫자가 더 필요한데 바로 버스 번호다. 보통의 여행이 3차원이라면 버스여행은 4차원이 된다.


시간을 넘나드는 4차원의 시간여행자는 3차원의 인간에겐 전지한 자다. 4차원의 버스여행자도 그렇다. 직선을 곡선으로 둘러가고 버스를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지만 그런 행동은 3차원 여행자의 심상의 차원을 넘나든다. 버스여행자의 그 여유로움을 직면하면 꼭 내 맘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올레길 열풍이다. 그러나 그렇게 준비된 길을 가야 걷기의 줄거움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길은 평등하다. 길은 무수하다. 그리고 길은 읽기다. 길의 즐거움은 길 자체가 아니라 그 길을 읽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을 택하고 기다릴줄 아는 사람에게 길은 읽을 거리와 볼거리로 보상할 것이다.


자 떠나자. 김훤주 기자처럼 "배낭에는 시원한 물 한 병과 심심풀이 과자 부스러기 정도만 넣"고 버스에 올라보자. 너무 막막하다고? 김훤주 기자의 책을 읽어보자. 김훤주 기자가 길의 즐거움을 어떻게 누리는지 실감나고 재밌게 보여준다. 경남에 산다면 더불어 맛집과 길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 오늘 당신이 타고 떠날 버스 번호는 몇 번인가? 어떤가? 버스 번호가 이렇게 설레였던 적이 있었던가? 김훤주 기자의 책이 여행의 새로운 차원을 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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