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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나의 6.10 항쟁

커서 2007. 6. 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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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의 87년은 내게 행복했던 한 해였다. 그전까지 철저히 통제받던 나의 시간과 공간을 누구도 제한하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 혁명과도 같은 변화였다. 지옥같은 학교를 탈출했다는 행복감에 비하면 대학에 못갔다는 아픔은 정말 사소한 것이었다. 이문세의 노래만 들어도 감성은 폭발할 듯 넘쳐났고, 컵라면에 샌드위치를 찍어먹는데도 맛있었다. 행복의 증거로 56kg이던 몸무게가 68kg까지 불어났다.

그 해 대한민국도 나처럼 변화의 순간에 들어서 있었다. 연초부터 데모소식이 들리더니 부산 재수생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초읍도서관에도 서면으로부터 최루탄 향기가 밀려왔다. 전두환은 독재자고 시위학생들은 애국자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루탄 냄새는 새파랗게 젊은 우리에게 정의에 대한 의무감으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는데 그러나 이내 재수생이라는 자조가 그 긴장감을 해체시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중 한 녀석이 이 긴장과 해체의 반복을 깨뜨렸다. 시위현장으로 갈건데 같이 갈 사람 없냐며 앞장을 선 것이다. 외면할 수 없었다. 대답을 해야 했다. 안가겠다면 ‘정의’를 저버릴만한 타당한 이유도 말해야 했다. 그 녀석의 한마디에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다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가겠다고 대답했다.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 6월 어느 날 우린 남포동으로 갔다. 버스에 내려서부터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먼저 자갈치 고래고기집으로 향했다. 천원씩 모아 고래고기에 소주를 시켰다. 일인당 3잔 정도 돌았는데 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독재시대에 투사가 된 젊음들도 아마 그때 우리들처럼 집에 가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지도.

집회 현장은 여러 곳이었다. 그 중 한 군데에 자리 잡았다. 대여섯줄 앞에 전경들이 있었는데 한 여학생이 그 전경들의 방패에 장미꽃을 꼽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얼마후 돌아보니 뒤로 까마득한 대열이 앉아있었다. 그때서야 우리가 시위대 거의 앞줄에 있다는 걸 알았다. 두려웠다. 여기 이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무슨 확신같은 게 있어 두렵지 않은 걸까?

시위대가 데모가를 부르며 움직이자 전경들이 바삐 돌아나가기 시작했다. 앞길이 열리는 듯 싶더니, 얼마 뒤 하늘에서 펑펑하며 연기가 터지기 시작했다. 소리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바로 그 즉시 우리는 뒤로 뛰었다. 열심히 뛰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 앞으로 오세요”

첫 시위 현장을 빠져나오니 한 녀석이 집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갈 수가 없었다. 그건 처음 느꼈던 의무감과는 달랐다. 의무감에 흥분감이 섞이기 시작했다. 데모대가 잡은 버스에 올라타버렸다. 수십명이 올라탔지만 아무도 차비를 내지 않았다. 아저씨도 차비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2차 시위현장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광복로 4차선 대로를 꽉 채운 줄이 수십미터 이어졌다. 옆에 구경나온 아저씨들 소리가 들렸다. “부산이 지금 최고다. 서울도 이 정도 안된다” 정말 뉴스에서 나온 서울 시위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인파였고 장관이었다.


시위대가 어느 정도 밀고 나가면 최루탄과 지랄탄이 쏟아지고 곧이어 전경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면 수만명의 시위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로는 텅 비어버렸다. 공백은 길지 않았다. “삼천만 잘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라는 노래 소리와 함께 골목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 그만큼의 인파가 다시 모였다. 그렇게 흩어지고 모이는 시위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영화속에 그런 장면이 있다. 아군이 고립되어 괴멸 직전에 있는데 언덕 너머 여기 저기서 구원부대가 등장한다. 장엄한 음악이 흐르고 고립된 아군들은 감격적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 장면의 감동을 실제로 겪었다. 전경에게 도망간 줄 알았던 시위대가 희미하게 들리는 노래소리와 함께 골목골목 나타나는 현장에 바로 내가 있었다. 지금도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이란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때 그 장면이 생각나고 목이 매여온다.

내 인생에서 그 때 처음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이 같은 전율을 경험하지 못했다. 2002년 월드컵 세대가 대규모 길거리 연대의 추억을 공유한 세대로 비교된다. 그러나 2002년의 감동은 87년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못된다. 긴장감 가득한 공간에서 수만명의 시위대가 보여준 그 역동적 장면은 월드컵 우승을 해도 느끼지 못할 감동이다.

개선문을 통과하는 느낌을 알 것 같다. 시위 대열이 대로를 행진할 때 육교 위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질렀다. “느그들한테 이런 일 시켜서 미안하다” 하늘에서 과자와 하얀 담배개비가 비오듯 쏟아졌다. "이것밖에 주지 못해 미안하다” 나는 이제 정말 집에 가기 싫어졌다.

부산역 근처에 가니 택시기사아저씨가 붙잡았다. “학생들 우리가 도와주께. 자 타라.” 택시 수백대가 시위대 앞으로 모여 일제히 크락숀을 울려댔다. 택시를 앞세워 돌파하려는 것이다. 번호판은 모두 수건으로 가렸다. 그게 오히려 기사아저씨들의 결의를 더 확실히 보여주었다. 택시마다 학생들 두 세명이 타고서 진압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20살 87년 그날의 기억들은 머릿속에 그대로 박혔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내 인생 평생의 명령이 되었다. 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 행동을 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전율 넘치는 연대를 보았기에 난 좀 덜 야비해졌을 것이다. 박수쳐준 회사원들, 과자를 던져준 노동자들, 시위대를 도와주겠다던 택시기사들의 모습이 이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의 버팀목이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이 사회를 신뢰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87세대다. 2002년 세대는 월드컵을 기다리겠지만 우리는 정치의 계절을 기다린다. 박수소리, 환호성, 육교위의 회사원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치의 가능성을 우리는 그때 봤다. 약자인 대중이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87세대는 대중정치운동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정치를 기대한다는 것은 바로 이 사회에 대한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87세대는 그동안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큰 기여를 했다. 앞으로도 87세대는 민주주의 위기가 올 때마다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지를 것이다. 죽는 날까지 이 사회 민주주의의 버팀목이 될것이다. 왜냐하면 20년 그때의 그 전율을 잊을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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