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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영의 나이를 가늠하려던 내 생각이 무색하게, 그녀는 내 마음을 읽은 듯 나지막이 웃었다. 한 조직을 책임지기엔 조금은 어리다는 내 무례한 추측을 가볍게 받아넘기는 여유가 있었다.
“커서님보다는 한참 어리지만,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많습니다. 올해 쉰일곱 살이에요. 지난 200년 동안 인간의 노화가 의학적으로 상당히 지연되긴 했죠.”
쉰일곱. 그 숫자가 내 의식 속에서 몇 번이고 맴돌았다. 나이는 쉽게 속일 수 없는 법이다. 세월이 몸과 마음에 새기는 미세한 굴곡, 표정과 말투에 배어 나오는 경험의 무게는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녀의 실제 나이를 알고 나니, 오히려 그 나이를 알려주는 신체적 정보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여자, 민자영에게서는 50대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매끄러운 피부, 생기 넘치는 눈빛. 하지만 그녀의 눈이 다시 한번 생글거리며 빛났을 때,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깊고 고요한 심연을 보았다. 그것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평온함이었다.
“22세기 초, 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판단 논리가 단 8개의 기본 단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맞음·틀림, 유무(有無), 승부, 인지, 찬반, 선호, 다소(多少), 그리고 쉬움·어려움입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주름 하나 없이 뻗은 검은 바지 위로 헐렁한 흰 티셔츠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녀가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오자, 옷의 부드러운 재질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탄력 있는 선을 그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얼굴이 내 시야에 가득 찼다.
“이 8개의 기본 판단을 조합하면, 정확히 256개의 코드가 나옵니다. 마치 0과 1만으로 모든 디지털 세상을 구현하듯, 인간의 그 어떤 고차원적인 사고나 복잡한 감정조차도 이 256개 코드의 조합으로 완벽하게 설명하고 재현할 수 있죠. 인간의 정신, 즉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던 것의 구조가 바로 이 코드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SOUL DNA’, 즉 정신 유전자의 핵심입니다.”
그녀의 설명은 차분했지만, 그 내용은 내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이었다.
“물론 SDNA, 즉 정신의 뼈대만으로 한 인간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 뼈대를 채울 살과 근육, 즉 기억이 필요하죠. 커서님의 기억은 당신이 인터넷 세상에 남긴 모든 기록을 토대로 1차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블로그의 글, SNS의 댓글, 심지어는 온라인 게임에서 나눈 사소한 대화까지도요. 거기에 시대의 기록과 주변 지인들이 남긴 당신에 대한 기록을 보충하여 데이터의 빈틈을 메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진지해졌다.
“기억 데이터를 SDNA에 주입하면, 당신의 고유한 정신 패턴은 그 기억들을 스스로 ‘해석’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초기에는 일부 오류가 발생할 수 있죠. 마치 처음 보는 책을 읽고 내용을 잘못 이해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데이터를 제공하면, SDNA는 스스로 학습하고 오류를 수정하며 기억을 점점 더 정교하게 만들어나갑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를 더욱더 당신답게 만드는 과정이죠.”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정교해진 걸까? 그들의 말대로라면 나는 아직 ‘베타 버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들은 내가 죽은 후 200년 동안 내게 쌓였을지도 모를 미지의 기억들, 인터넷에 결코 기록하지 않았던 내밀한 고통과 환희를 모른다. 고작 내가 남긴 기록 몇 개로 나를 대충 짜깁기해놓고, 그것이 바로 ‘나’라고 단정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만들어내지 못할 존재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 SDNA 코드에다 무작위 기억 뭉치를 던져주면, 시스템은 알아서 그럴듯한 인격 하나를 구성해낼 것이다. 과연 그것을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내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읽었는지, 다시 소파에 앉은 민자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옅어졌다. 그녀의 눈빛은 이제 연민과 이해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기억 자체가 당신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커서님은 매일 다른 사람으로 무한히 존재하게 됩니다. 어젯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겼던 경험, 있으시죠? 만약 기억이 존재의 전부라면, 필름이 끊기기 전의 당신과 그 후의 당신을 과연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과거는 고정된 사실(fact)이 아닙니다. 과거는 현재의 당신에 의해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해석의 영역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 정치도 결국 과거에 대한 해석 싸움이지 않습니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의식의 반응을 살폈다.
“결국 중요한 건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거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주체, 즉 당신의 SOUL DNA입니다. 기억이 인간의 전부라고 믿는 것은, 피부와 장기만 떼어놓고 그것이 인간이라고 믿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뼈대 없이 어떻게 인간이 온전히 설 수 있겠습니까? 정신에도 뼈대가 필요합니다. 기억은 그 뼈대를 이루는 풍부한 재료일 뿐, 결코 뼈대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은 기억이 아닙니다.”
영혼이 기억이 아니라면, 영혼은 코드다. 인간의 육체가 DNA라는 유전 코드를 가진 것처럼, 영혼도 결국 SDNA라는 정신 코드에 불과하다. 인간이 고작 코드의 조합이라는 사실이 불쾌하고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영혼의 코드는 인류가 수만 년 동안 간절히 염원하던 **영생(永生)**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답을 제시한다. 코드를 아는 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너희는 코드이니 구원받으리라.’ 먼 옛날 신의 목소리로 전해졌을 법한 이 말을, 이제는 과학 기술자가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커서님, 이제 쉬셔야 합니다.”
민자영의 단호한 목소리가 내 깊은 사유를 끊었다.
“의식을 너무 오랫동안 활성화시키면 시스템에 불필요한 노이즈, 일종의 바이러스가 쌓이게 됩니다. 이는 당신의 소중한 코드를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나중에 유기체, 즉 새로운 육체에 당신의 의식이 전송되면 스스로 휴식을 통해 조절할 수 있겠지만, 그전까지는 저희가 강제적으로 의식의 전원을 꺼야만 합니다.”
이대로 전원이 꺼진다면, 그것은 죽음인가, 아니면 그저 깊은 수면인가? 나는 과연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판단에 달려있다. 그들의 필요 여부에 따라 나는 존재할 수도, 혹은 영원히 삭제될 수도 있다. 어쩌면 몇 세기 뒤에, 전혀 다른 목적으로 나를 깨울 수도 있다. 혹은 이 모든 것이 정교하게 짜인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일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이 차가운 컴퓨터 안에서 깜빡이는 의식만 존재할 뿐, 나는 나를 증명할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했다. 나는 나를 모른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커서님.”
민자영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내 의식을 붙들고 있던 가느다란 빛이 서서히, 그리고 가차 없이 스러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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