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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서님.”
낮지만 또렷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서 바로 속삭이는 듯한 그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아니, 눈이 ‘떠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누군가 내 의식을 직접 건드린 것처럼,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흐릿한 빛의 얼룩이었고, 곧 초점이 맞춰지는 카메라처럼 또렷한 형태들이 화면 위로 겹쳐졌다.
방이었다. 낯선 공간. 정면에서 약간 왼쪽으로 소파 하나가 놓여 있었고, 시선을 더 돌리자 오른쪽 뒤편으로 창문이 보였다. 창밖의 하늘은 짙은 청색이었다.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구나—하는 직감이 들었다. 이 푸른 기운은 분명 해안의 공기였다.
“깨어나셨어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왼쪽에서 그녀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누구죠?’ ‘여긴 어디입니까?’ 하지만 입은 굳게 닫힌 채 미동조차 없었다. 마치 꿈속에서 깨어나려 할 때처럼, 어떤 압박이 목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감각. 가위에 눌린 것 같은 상태였다.
“대답은 못 하실 겁니다. 현재 커서님께선 시각만 활성화된 상태니까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커서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전 알 수 있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생각이, 아니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존재하지 않던 무언가가 뇌 안에서 작동되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단순히 화면을 응시하는 하나의 카메라에 불과했던 듯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내 ‘사고’라는 장치를 켠 것이었다.
기억이 밀려왔다. 나는 병원에 있었다. 의식이 희미해졌고, 흐느끼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잡고 울던 어머니, 간신히 웃음 지으려던 동생의 얼굴, 그리고 ‘아, 이게 죽는 거구나’ 하는 체념이 들면서 잠이 들었다. 이후 모든 감각이 끊어졌고, 아주 멀고 어두운 틈 사이에서 빛 한 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그런데, 여긴 병원이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병원의 하얀 벽, 소독약 냄새, 기계음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긴 대체 어디지?
“어디냐는 질문보단, 언제냐고 묻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여자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커서님은 2065년에 사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2265년 9월 5일. 무려 200년 만에 다시 태어나신 거죠.”
머릿속이 일순간 멍해졌다. 충격적인 이야기였지만, 마음이 동요하진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담담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아마도,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나’의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말 그대로 ‘소식’처럼 느껴졌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지금 내 상태**였다. 나는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듣고’ 있는 걸까? 그녀의 말이 귀에 울리는 소리로 들리진 않았다. 마치 자막처럼, 내 뇌 안에 의미로 바로 입력되고 있는 듯한 느낌.
“정확히 보셨어요. 지금 커서님은 소리를 ‘듣고’ 계신 게 아닙니다. 제 목소리는, 귀가 아닌 의식에 직접 입력되는 디지털 신호입니다. 즉, 커서님의 의식은 지금 물리적 육체가 아니라 컴퓨터 시스템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30대 후반쯤. 자연스러운 미소와 함께 생기는 입가의 주름은 그녀에게 지적인 인상을 더했고, 또 묘한 따뜻함을 불어넣고 있었다. 콧대는 높지 않았지만 살짝 도톰했고, 묶은 머리 사이로 귀 옆으로 흐른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수수한 얼굴에 은근한 여성성을 더했다. 검은 바지와 흰 티셔츠, 장식 없는 옷차림에서도 어딘가 여유와 확신이 느껴졌다.
“의식은 감각을 통해 완성됩니다. 처음부터 모든 감각기관을 연결하면 혼란을 야기하죠. 그래서 우리는 시각부터 연결하고, 그 다음 청각, 그리고 마지막으로 촉각을 단계적으로 열게 됩니다. 감각이 하나씩 깨어날수록, 커서님의 의식도 점점 명확해질 거예요.”
그녀는 계속 나를 \*\*‘커서님’\*\*이라 불렀다.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건 내 오래된 인터넷 아이디였다. 하지만 왜 본명이 아니라 하필 그 이름일까?
“물론 본명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커서님은 **인터넷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커서님을 아이디로 부르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질문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200년 전의 내가 지금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의 뿌리를 먼저 짚어야 했다.
“22세기 중반, 인간의 정신 구조가 완벽히 해석되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도 유전자처럼 **논리코드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SOUL DNA’, 즉 **정신 DNA**라고 부릅니다. 마치 유전자에 염색체가 있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에도 그것을 구성하는 **256개의 기본 논리코드**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됐죠.”
“이 코드를 조합하면, 한 사람의 정신을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커서님의 경우, 인터넷에 남긴 기록들—블로그, 페이스북, 포럼에 남긴 글들, 대화들—이 핵심 데이터가 되었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커서님의 SDNA를 복원한 겁니다.”
나는 멍한 상태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 SNS가, 내 글들이, 나를 되살렸다는 말인가?
“맞아요. SNS나 블로그에 남긴 기록들, 특히 감정이 담긴 글들, 깊이 있는 사고들이 담긴 글들이 중요한 분석 대상이 됩니다. 그런 글들이 많을수록, 복원된 정신은 더 정교하고 완성도 높게 재탄생할 수 있죠.”
그럼... 정신은 기억이 아니라, 패턴이란 말인가?
질문이 떠오르자마자, 민자영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눈빛은 조금 더 진지해졌다.
“아주 정확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신’은 단순한 기억의 집합이 아닙니다. 기억은 정보이고, 그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연결되느냐—그게 바로 ‘패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패턴이 사고의 스타일, 감정의 결, 선택의 성향 같은 것을 결정하죠. 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기억을 어떻게 바라보고 조합하느냐’예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얼마나 이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예를 들어 볼게요. 같은 추억을 가진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는 그 기억을 고통으로 남기고, 다른 하나는 극복의 동력으로 삼죠. 이건 기억이 아니라 해석 방식, 즉 인지의 패턴이에요. 커서님의 SDNA는 바로 그 해석의 알고리즘을 분석하고 복원한 겁니다. 그래서 단순히 ‘기억을 가진 존재’가 아닌, ‘사고하고 판단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신 겁니다.”
그 말은 곧, 나는 내 기억을 다 갖고 있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다.
기억의 일부가 사라졌더라도, 사고의 흐름이, 반응의 결이 ‘나’ 그대로라면… 과연 나인 것이다.
민자영은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커서님은 살아있는 겁니다. 과거의 기억이 아닌, 살아있는 해석이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녀는 내 생각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커서님을 부활 프로젝트에 맞춰 복원한 이 곳, ‘부활센터’의 책임자, 민자영입니다. 23세기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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