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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체인질링에서 경찰은 아이를 잃은 엄마 크리스틴에게 가짜 아이를 데려다줍니다. 경찰이 크리스틴에게 가짜 아이를 데려다 준 이유는 유괴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비판적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은 가짜 아이로 이벤트를 해서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경찰은 자신의 진짜 아이를 찾아달라는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감금하면서까지 그들의 거짓말을 숨깁니다. 놀랍게도 체인질링은 실화를 그대로 옮긴 영화입니다.

한국에도 체인질링처럼 경찰에 의해 사건의 내용이 완전히 뒤바뀐 실화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판 체인질링에서 뒤바뀐 건 아이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였습니다. 김주완기자의 책 "대한민국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에 보면 이 기막힌 사건에 대해서 나옵니다. 김주완기자가 기자가 되기로 한 것도 바로 이 사건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건이 벌어진 건 1991년 10월10일이었습니다. 이날 진주전문대(현 진주국제대)에는 총학생회 선거가 있었는데 선거분위기가 상당히 좋지않았다고 합니다.




주로 여학생들로 구성된 운동권 측 선거운동원에 대한 비운동권 측의 선거운동원들의 협박이 특히 위험수위였다고 합니다. 선거 전인 9일에도 양측 간의 욕설과 폭언 등의 다툼이 있었고 이 소식은 진주충무지역 총학생회협의회에 접수되었습니다. 폭력사태를 우려한 진충협은 10일 오전 급히 사수대를 모집하였고 이날 오후 3시30분에 진주전문대에 40명의 사수대가 도착합니다. 




사수대는 개표장과 떨어진 강의실에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터진 건 도착 30분 뒤였습니다. 사수대가 모여있던 강의실에 진주전문대생들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쳤고 진충협의 사수대는 그대로 붙잡히게 됩니다.



 
완전히 제압당한 사수대는 진주전문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진술서를 썼고 가지고 온 물건들은 모두 경찰에 증거품으로 인계됩니다. 이날 모두 33명의 학생들이 진주전문대생에 의해 경찰의 닭장차로 인계되었습니다.

김주완기자가 목격하고 취재한 바에 의하면 진충협의 사수대는 저항도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타학교에 쇠파이프와 최루탄을 들고 가긴 했지만 그들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진주전문대 운동권 후보의 신변보호 요청에 의해 갔지만 자신들의 신변도 보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날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보도한 신문의 기사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합니다. 동아일보 10월 11일자가 전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10일 옹후 5시반경 진주시 하대동 진주전문대 201호 강의실에서 진행된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개표장에 경상대 써클인 지리산결사대 소속 유형민(19 경상대 무역과 1년) 등 대학생 33명이 쇠파이프와 최루탄을 갖고 들어가 20여분 동안 난동을 부렸다. 경상대생들은 진주전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후보인 천재동(19 전자계산과 1년)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 강의실 유리창 2장을 깨고 들어가 최루탄 1발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김주완기자는 폭력의 장소가 틀리고, 시간도 안맞고  폭력의 주체도 뒤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기사는 운동권 후보가 어렵지않게 선거를 이겼는데도 낙선이 예상되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경찰이 발표한 내용은 언론들에게 좋은 먹이감이었습니다. 같은 달 21일 언론노보의 폭로에 의하면14일 뒤늦게 알려진 이 사건에 대해 지방담당데스크들이 '이렇게 좋은 재료를 왜 안보냈느냐'는 투의 항의전화를 지역에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언론들은 이 사건의 확인취재도 전혀 하지 않은 채 경찰 발표만을 그대로 받아 보도 경쟁을 했고, 경상대 '지리산결사대의 정체'/폭력투쟁 앞세운 운동권 전위 등의 기사를 통해 학생들을 빨치산 못지 않은 조직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언론에 의해 빨치산 후예로 만들어진 학생들에게 법원은 1년에서 3년8개월까지의 실형을 선고합니다. 타 대학에 쇠파이프를 들고 간 사실만으로 6명이 1년 이상의 실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폭력의 쌍방 중 하나로 볼 수 있는 진주전문대생 중엔 법으로 처벌받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김주완기자는 자신이 목격하고 취재한 내용으로 사건의 진상을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간지들은 김주완기자의 기사를 철저히 묵살했습니다. 김주완기자는 그렇게 많은 목격자가 있음에도 조작이 가능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80년 광주가 진주에서 다시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등골에 서늘함까지 느꼈다고 합니다. 




김주완기자에게 28일 오전 전화를 걸어 이 사건에 대해 조금 더 물었습니다.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사면복권되었고 대부분 민주화운동관련자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련자들이 진상규명을 요청하지 않아 사건은 아직 그대로 묻혀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김주완기자는 휴대폰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이 목격·취재한 사건의 진상이 사실임을 힘주어 말했습니다. 

사건 10년 뒤 김주완기자는  <다시 쓴 '지리산 결사대' 사건의 진상>이란 기사를 썼습니다. 사건 당시 활동했던 지역기자들 대부분이 이때에도 현업에 있었는데, 그 중 아무도 당시 기사가 틀렸다는 김주완기자의 주장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사의 사실성은 기자의 생명입니다. 기자가 자신의 기사가 틀렸다는 지적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만큼 강력한 근거는 없을 것입니다.

87년 6월 항쟁이 4년이나 지나고 X세대의 열풍이 불던 91년에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1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요? 이제 체인질링은 한국에서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된 걸까요? 요즘 때때로 섬뜩함을 느끼는 건 제가 너무 민감해서 그렇겠죠?

김주완기자에 대해선 아래 책의 표지에 나오는 설명을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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