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녀'에 영감 받아 쓴 책 <평판의 미래>
미국의 오클라호마 폭파 사건 직후 AOL게시판에 거짓 게시물이 올라왔다. 해당 게시물에서 개인정보를 노출당해 심각한 전화협박에 시달린 케네스제런은 AOL을 고소했다. 중상적 게시물을 지우지 않아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법원은 제런의 소송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법원의 판결은 96년 통과한 CDA230조에 근거한다. 이 조항은 ISP와 온라인 공간 제공자는 사용자의 발언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못박고 있다.
한 남자가 그의 전 여자친구의 누드사진과 개인정보를 야후에 올렸다. 사태를 파악한 사진 속 여성은 야후에 여러 차례 삭제를 요청했다. 그러나 야후는 사진을 내리지 않았고 결국 그 여성은 야후를 고소했다. 그러나 이 소송도 CDA230조에 근거해 기각되었다.
너무나 다른 풍경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사용자의 게시물에 대해 어떤 책임도 포털에 묻지 않고 있다. 책 <인터넷 세상과 평판의 미래>는 온라인 프라이버시에 대한 저자의 고찰보다 두 나라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법적 태도의 차이에 더 궁금증이 생기게 한다.
저자 다네일 솔로브는 조지워싱턴대학교 법학과의 부교수이자 프라이버시법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솔로브교수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은 프라이버시보다 표현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미국의 법적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아마 솔로브교수는 한국의 개똥녀사건이 프라이버시에 무관심한 미국의 법조계에 자극이 될만하다고 생각한 듯 하다.
솔로브교수가 밝힌 표현의 자유를 다룬 수정헌법 1조에 대한 미국사회의 애정은 이 정도다.
"누군가의 비천함은 또 다른 이의 서정시다."
(연방대법원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유명한 판결문)
"잘못된 발언은 자유토론에서 으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훼손되지 않을 '최소한의 발언공간'이 보장된 경우라면 잘못된 발언은 보호받아야 한다,"(1964년 명예훼손에 대해 표현의 자유가 우선함을 밝힌 뉴욕타임스대 설리발 판결)
이러한 미국법원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신봉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홀대는 판결로 나타난다.
한 부부가 농산물 직매장 아이스크림 판매대 부근에서 로맨틱한 포옹에 열중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 장면을 찍었고, 눈부신 사랑을 축하하는 기사로 <하퍼스바자>의 1947년 10월 호에 실렸다. 그 커플은 자신들의 애정행위가 전국 발행 잡지에 실리는 사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당황스러웠고 챙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적 사실을 공공연하게 노출한 잡지사를 고소했다. (중략)그러나 법원은 커플이 "원래 그곳에 있었거나 혹은 각자 일을 보던 이들의 시야에 노출된 곳에서 누구나 볼 수 있게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노출했다"라며 소송을 기각했다.
한 부부가 술집에서 수갑을 찬 일이 있었다. 당시 그 장소에 있던 tv방송국 직원이 체포 장면을 촬영했다. 나중에 체포 행위가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났고, 그 부부는 tv방송국으로 가 테이프를 방송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기사는 방송을 탔다. 부부가 이를 고소했지만 법원은 "일반인이 훤히 지켜보는" 공개된 장소에서 찍힌 체포장면이라며 기각했다.
솔로브교수는 공공장소 여부에 따라 프라이버시 보호 여부를 판단하는 미국 프라이버시법은 이분법적이라며 "몇사람의 옅은 기억에 남는 것과 만인에게 보도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라고 말한다. 제한된 장소에서 일부에게만 공개한 것이 인터넷을 통해 수십억에게 보여주는 걸 허락했다는 표시는 아니라는 게 솔로브교수의 주장이다.
일반적 상식에도 솔로브교수의 말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유럽 등 많은 국가는 공공장소에서의 프라이버시가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한다.
서두에서 두 나라의 포털에 대한 법적 태도의 차이에 대해 얘기 한 것은 이 책이 최근 최진실법 논쟁이 한창인 한국에서 오독될 위험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솔로브교수는 표현의 자유 전통이 강한 미국사회의 프라이버시 홀대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가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그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국내의 온라인 프라이버시 논쟁에 솔로브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은 균형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보다 프라이버시를 우위에 두는 우를 범하게 될지 모른다. 이미 중앙일보가 이 책의 일부 구절을 인용해 최진실자살 사건 기사에 인용한 것을 봐도 이런 걱정이 기우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오독의 염려 때문에 책을 멀리할 순 없지않은가? 혹시나 오독하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법적 논쟁을 다루는데도 저자가 블로그를 운영하기 때문인지 책은 아주 재밌고 쉽다. 온라인 프라이버시 논쟁에 필요한 전세계의 다양한 예와 자료들을 전해주는데, 그 생각꺼리들은 인터넷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변곡점을 던져줄 수 있을 정도의 무게감이 있다.
특히 신문이 19세기까지 저급한 사적 가쉽을 다루다 점점 규범을 가지게 되었다는 부분은 청소년기 쯤에 해당하는 지금의 인터넷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인터넷은 신문의 19세기적 상황일 수 있다. 이후 여러가지 과정을 거쳐 인터넷이 나름의 규범을 만들어 갈 수 있는데 이러한 과정에 법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자율적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지금 무엇을 정하기엔 아직 이를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정보유통의 급속화가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기반을 변형시킬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상처받는 것들이 나중엔 기본적 공개사항이 될 수도 있다. 일부 사적 비밀은 무용해질 수 있다. 개인은 자신에 관해 급속히 퍼지는 가십에 대해 적극적 대처를 하면서 인터넷 환경에 적응할 수 도 있다. 그러면 그때는 지금 서둘러 만든 법이 과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주장 하나만 비판하고 끝내자.
솔로브교수는 미국법이 프라이버시에 관해 이분법적 접근을 한다고 비판했는데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봐야 한다. 이분법은 정교하지 못하다고 하지만 정교함은 또 불안하고 해석이 어렵다. 현실을 법이 정확하게 판단하려는 건 법의 오만함일 수 있다. 법은 그럴 수 없다.
법은 일종의 룰이라는 생각도 가져야 한다. 판결의 정확함을 추구하기보다 스포츠경기의 룰처럼 룰의 전반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이 법의 목적일 수 있다. 누구나 억울함이 없는 판결의 공정함에만 매달리다보면 다른 것들이 흐트러질 수있다. 룰은 정교함을 기대하기 보다 그저 따라야하는 것이다. 그래야 게임이 안정되게 된다. 나는 그런 점에서 미국 법원의 이분법적 접근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 미국수정헌법 제1조 (종교,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및 청원의 권리)
연방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또는 자유로운 신교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또한 언론, 출판의 자유나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사항의 교제를 위하여 정부에게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