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를 이기려면... 때리지 말고 가둬라
- 박근혜는 ‘정치적 풍모‘ 부족한 퍼스트레이디형 신비주의 정치인
박근혜는 사람들을 만날 땐 항상 얼굴에 온화한 웃음을 짓는다. 인사할 때면 겸손히 몸을 숙여 손을 잡는다. 박근혜가 몸에 배어 있는 이런 태도는 정치인으로서 좋은 정치적 자산이다. 그래서 새누리당은 싫어해도 이런 박근혜에겐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않다. 그러나 박근혜는 호감은 들게 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질감은 잘 느껴지지 않는 정치인이다. 정치인에게 정치를 느낄 수 없다면 그건 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의 딸로서 겪은 삶의 굴곡이나 새누리당 대표로서의 이력 등을 볼 때 이런 평가가 의아할 수도 있다. 배경 스토리를 감안하면 박근혜는 결코 얕은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에게 '정치적 풍모'라는 말을 던져보면 느낌이 좀 달라진다. 정치적 태도도 좋고 누구보다 깊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박근혜에게 '정치적 풍모'는 왠지 어색한 느낌이다.
다른 여성 정치인과 비교해보면 이 점은 두드러진다. 여성적인 외모의 추미애 의원은 추다르크라는 별명처럼 강인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세련된 도시녀 인상의 박영선 의원은 또박또박하고 저돌적인 화법으로 유명하다. 온화하다는 점에서 박근혜와 비슷한 여성적 면모를 보여주는 한명숙 의원은 포용의 리더쉽으로 통한다. 이렇게 다른 여성 정치인들은 여성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중 앞에서 자신들만의 '정치적 풍모'를 보여주는데 이에 반해 박근혜는 그저 조신하다는 느낌만 준다.
박근혜에겐 카리스마가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극도로 말을 자제하고 단문정치를 하는 박근혜에겐 분명 카리스마가 있다. 그러나 카리스마는 '정치의 결'은 될 수 있지만 '정치적 풍모'는 아니다. 카리스마라면 조폭두목이 왠만한 정치인보다 더 강할 것이다. '정치적 풍모'는 카리스마 같은 조직 장악력이 아니라 대중이 기대하는 '정치인의 면모'다. 카리스마는 추종의 선이지만 '정치적 풍모'는 소통의 접점이다.
새누리당 당대표까지 지내고 선거의 여왕이라는 소리를 듣는 박근혜가 '정치적 풍모'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의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후 5년 동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퍼스트레이디는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있는듯 없는듯 행동해야 하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다. 20대의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위해 조신하고 또 조신했을 것이다. 이런 역할은 '정치적 풍모'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없다.
청와대를 나온 후에도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은 계속 이어진 것 같다. 1989년 MBC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유신과 자주국방은 뗄레야 뗄 수가 없다"면서 유신을 정당화 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청문회에서는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했고 또 "만약 아버지가 그때 총탄에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유신체제를 끝내고 대통령에서 물러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아버지에 대한 신앙 같은 믿음을 드러냈다.
▲ 1975년 영동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책<사람vs사람>에서 "박정희처럼 거의 신격화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박근혜가 "부성컴플렉스에서 자유롭다면 오히려 이상"하다고 말한다. 아버지에 대한 신앙은 박근혜가 아버지를 전제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정치인이 된 후에도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에게 '정치적 풍모'를 의존하고 자신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계속 해온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런 박근혜가 강할까? 정치적 풍모도 없고 아버지의 대리인 같은 역할만 하는 박근혜가 정치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뭘까? 물론 아버지 박정희의 영향력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거기에 퍼스트레이디 박근혜에 대한 대중의 기억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이런 자산만으로 정치적인 유력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산은 적절한 방법으로 관리·운용 되어야 한다. 박근혜가 찾아낸 자산의 관리·운용 방법은 신비주의다. 2011년 12월 15일 새누리당 의원총회에 박수가 울려퍼졌다. 이 박수는 2년 7개월만에 총회에 참석하는 박근혜를 환영하는 박수였다. 코메디 같은 일이지만 같은 당 의원들은 박근혜의 신비주의에 적극 호응했다.
그러나 박근혜의 이런 신비주의가 과연 대선판에서도 통할까? 그럴 것 같진 않다. 박근혜의 신비주의는 같은 당 후보와의 경선에서도 아주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토론회에서 다른 후보들과 동등하게 노출된 박근혜는 불안한듯 눈동자를 계속 굴렸고 말투는 차타기 직전 단문을 내뱉을 때의 단호함과 달리 긴장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버벅거려 듣기 안스러울 정도였다. 대선판은 노출을 피할 수 없다. 노출을 통해 신비주의가 사라지면 '정치적 풍모'가 없는 박근혜에겐 조신함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가 야권의 문재인이나 안철수와 함께 노출되면 어떨까? 얼마 전 그 영향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박근혜 후보의 '봉하마을 참배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문재인과 안철수는 칭찬릴레이로 대응했다. 그러자 박근혜의 참배정치는 별다른 파급력 없이 잦아들었다. 문재인·안철수의 인품정치가 박근혜의 참배정치를 상쇄시킨 것이다.
그동안 야권의 박근혜에 대한 공격은 별 효과가 없었다. 당연하다.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효과가 있을리 없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공격은 배경에 있는 박정희와 육영수 스토리를 더 부각시켜 존재감만 높일 뿐이다. 박근혜를 이길려면 때리는 게 아니라 퍼스트 레이디 역할에 가두어야 한다.
어떻게 가두냐고? 간단하다.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에 미리 보상을 해주면 박근혜의 존재감은 떨어지게 된다. 문재인, 안철수가 박근혜의 참배정치에 칭찬으로 대응한 것처럼 말이다. 10월이 지나 야권 주자와의 본격적인 비교 노출이 시작되면 박근혜의 지지율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