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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이 함양부사로 부임해서 보니 나라에 바치는 공물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공물은 대체로 토산물을 바치지만 함양의 경우 토산물이 아닌데도 차를 바쳐야 했다. 그래서 전라도에 쌀을 주고 차를 사야 했는데 그 가격이 비쌌다. 김종직은 이 폐단을 알고 백성들에게 차를 부과하지 않고 관에서 여기저기 구걸하여 납부하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관이 구걸로 공물을 납부할 순 없었다. 삼국사기를 열람해보니 신라시대에 당나라에서 차종을 구해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수소문한 결과 함양에도 읍에서 이십여리 떨어진 곳에 자생 차종이 자라고 있었다. 김종직은 땅주인들에게 관전으로 보상하고 그 곳에 차밭을 조성하였다. 4~5년 뒤엔 함양에서도 공물을 충당할 정도의 차가 생산되었다. 



김종직이 차밭을 조성하고 남긴 시 2수



欲奉靈苗壽聖君

新羅遺種久無聞

如今擷得頭流下

且喜吾民寬一分


竹外荒園數畝坡

紫英烏觜幾時誇

但令民療心頭肉

不要籠加粟粒芽



어느날 함양에 유자광이 찾아왔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유자광의 고모가 함양에 살았는데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다.  


관찰사가 왔으면 부사가 대접을 하는 게 관례다. 그러나 조선시대 최고의 간신으로 평가받는데다 무관에 서자 출신인 유자광을 김종직은 경멸하고 있었다. 김종직은 지방순행을 갔다는 핑계를 대고 유자광을 만나지 않았다. 공무가 아닌 사적인 일로 오는 것도 김종직에게 만나지 않을 명분을 주었다. 당시 김종직이 유자광을 피해 숨은 곳이 바로 이은대다. 





이은대란 글자 그대로 관리가 숨어 있었던 곳이라는 뜻으로 김종직이 유자광을 피해 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종직은 그 뒤 이곳에 작은 당을 짓고 이은당이라 불렀다. 김종직의 사후에는 군민들이 김종직을 추모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신사를 지어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도 했다. 지금은 충혼탑을 세워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은대 충혼탑



김종직과 유자광 두 사람의 대결은 학사루로 이어진다. 학사루는 통일신라시대 함양태수로 왔던 최치원이 자주 올랐던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유자광도 학사루의 절경에 감탄하여 시를 짓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었다. 그러나 유자광의 현판은 곧 사라진다. 김종직이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떼어내 불사르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입소문을 타고 유자광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김종직의 유자광에 대한 모욕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할때 제자들이 송별시회를 마련했는데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인사를 왔다.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술잔을 권하자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유자광에게 누가 시를 현판해서 걸어줄지 모르니 한 수 지어보라고 했다. 학사루 사건을 빗대어 유자광을 조롱한 것이다. 유자광이 김종직과 그 문하생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김종직 사후 6년 뒤 유자광에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수록했는데 이 글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했다는 공격을 받은 것이다. 조의제문은 무오사화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 등이 죽임을 당하고 사림파 선비들이 유배를 당한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한다. 



학사루 2층



둘의 스토리에서 김종직은 강직한 선비고 유자광은 간신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성리학적 질서를 꿈꾸는 사림파 선비들이 무관 출신에 서얼이었던 유자광을 과도하게 매도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런 점에서 사림파가 그렇게 끈질기게 탄핵을 했음에도 유자광을 거친 다섯 왕들이 유자광을 신임하고 곁에 두었다는 것은 생각해볼 부분이다. 


김종직은 '능력이 있는 문신을 천문·지리·음양·의학·사학·시학·율려(律呂) 등 한 분야에 배속시켜서 익히게 하라'는 세조의 전교에 유학 외에 나머지는 잡학이라고 반대한 적이 있다. 이에 세조는 김종직이 경박하다며 곤장을 내렸다. 실용학문을 천시하는 김종직에게 세조가 답답함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유자광은 왕에게 도공들을 아끼라고 건의하기도 했고 나인들이 수라상을 힘들게 옮기는 것을 보고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릴 것을 건의하다 연산군의 노여움을 받아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자신이 서얼 출신이라 그런지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유자광에게 있었던 것 같다. 


김종직과 유자광의 이 에피소드만을 볼 때 김종직은 강직하지만 고루한 선비로 유자광은 실용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비쳐진다. 보다 명확한 스토리가 후대에 더 잘 전달된다. 두 사람의 대결 스토리도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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