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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갯벌

 

 

불교에는 6법 공양물이 있다. 향과 차, 초와 과일, 꽃, 쌀이 있는데 이중에 향을 최고로 쳤다. 그런데 향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침향이다. 침향은 향기가 그윽할 뿐 아니라 뛰어난 영약로도 알려져 보석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다.

 

침향의 향이 뛰어난 이유는 나무에 생채기가 생겼을 때 이 치료를 위해 생성되는 수지 덕분이다. 다른 나무에도 수지가 생기지만 침향나무에서 생성되는 수지의 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수지 함량이 25%가 넘으면 물에 가라앉는데 이 침량을 최고급품으로 쳐줬다. 



사천 매향비

 


그런데 이 침향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없다. 베트남 지역에서만 자라는 나무라 침향은 임금과 귀족들에게도 귀한 물건이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신라시대 침향을 사치품으로 여겨 수입을 규제했을 정도다. 

 

왕과 귀족들도 함부로 쓰지 못하는 침향은 일반 민중들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동경은 신앙적 믿음으로 바뀌었다. 연금술사들이 보통 금속으로 금을 만들 수 있다고 믿은 것처럼 당시 민중들도 향나무를 강이나 바다에 오래 담가두면 오랜 세월 뒤에 침향이 되어 저절로 떠오른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으로 향나무를 묻은 것이 바로 매향(埋香)이다.


 

사천의 물억새



그러나 침향이 될 거라 믿었지만 그 침향을 자신이 얻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아들이나 손자들이 가질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침향은 수백년 수천년 먼 미래의 일이었다. 매향은 자신이나 후손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이었다.



침향沈香    /  서정주

 

 침향沈香을 만들려는 이들은, 산골 물이 바다를 만나러 흘러내려 가다가 바로 따악 그 바닷물과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잠거 넣어 둡니다. 침향은, 물론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 잠근 참나무 토막들을 다시 건져 말려서 빠개어 쓰는 겁니다만, 아무리 짧아도 2~3백 년은 수저水底에 가라앉아 있은 거라야 향기가 제대로 나기 비롯한다 합니다. 천 년쯤씩 잠긴 것은 냄새가 더 좋굽시요.


 그러니, 질마재 사람들이 침향을 만들려고 참나무 토막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내다가 육수陸水와 조류潮流가 합수合水치는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나 자기들 아들 딸이나 손자 손녀들이 건져서 쓰려는 게 아니고, 훨씬 더 먼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후대들을 위해섭니다.


 그래서 이것을 넣는 이와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수백 수천년은 이 침향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뿐, 따분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습니다.


 


사천 매향비에 새겨진 글자



매향으로 공양한 대상은 미륵불이다. 미륵불은 부처님 열반 후 56억7000만년만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세차례의 설법으로 282억명을 구제한다는 부처다. 불경은 이 용화세계에 태어나 미륵불의 교화를 받으려면 공덕도 쌓고 공양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매향은 용화세계를 염원하는 공양이다.   


가진 것은 없는 민초들이지만 부처님께 귀한 것을 공양하고 싶었다. 지금은 향나무지만 수천년 뒤 침향이 된다고 믿은 것은 그때문이다. 하지만 향나무가 침향이 되려면 수천년의 세월 동안 땅에 묻혀있어야 한다. 그래서 향나무는 비밀리에 묻혔다. 

 




매향을 한 후에 매향비도 만들어 묻었는데 지금까지 16개가 발견되었다. 이 매향비들은 모두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다. 정치·사회적으로 불안하던 시기에 미륵신앙이 성행하던 이치다. 사천 매향의 경우 4,100명이 매향에 참여했는데 당시 기록된 사천과 인근 지역의 인구는 3,000명에 못미쳤다. 그만큼 혼란한 세상에 대한 민중들의 불안이 극심했던 것이다.  

 

사천매향비가 발견된 흥사리는 지금은 논이지만 과거엔 갯벌이었다. 제방으로 물을 막으면서 땅이 된 것이다. 제방을 무너뜨리면 흥사리는 다시 물이 들어올 수 있다. 불가에 전해지는 얘기로는 매향의 최적지는 시냇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이라 했는데 흥사리가 당시엔 그런 곳이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 중 그 유래나 과정을 전하는 것은 사천 매향비를 포함하여 단 3개 뿐이다. 사천 매향비는 그 중에서도 다른 매향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게 기록된 매향비다. 그래서 사천 매향비는 사천의 유일한 보물이다. 


사천 매향비는 1977년에 발견되었다. 당시 매향을 행했던 민중들은 매향비가 이 시대에 발견되기를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사천 매향비는 56억 7천만년 뒤 용화세상에 나타나는 미륵불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타임캡슐이었다.

 




당시 민중이 기다리던 56억7천만년 중 1만년, 아니 1천년도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세상은 혼란스럽고 우리는 이 혼란을 일소해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600년 전 선조들의 기다림과 우리의 기다림 사이엔 시간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종이 한 장 차이도 없다. 고려 민중이 미륵불에게 보낸 메시지는 지금 우리가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사천 매향비 소개와 매향비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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