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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딸이었던 한명숙은 어릴 적부터 물지개를 많이졌고 그래서 잘 졌다고 한다. 물지개소녀 한명숙이 터득한 물지개 잘 지는 법은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다. 


하나 둘, 심호흡을 하며 무릎을 펴는 동시에 물통이 흔들리지 않도록 걸쇠가 걸린 줄을 바짝 당겨잡고 일어서면 거짓말처럼 허리가 펴졌다. 하지만 물지게를 지는 일은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언덕길을 오를 때는 무엇보다 호흡이 맞지 않으면 물통은 금세 신경질을 부리듯 물을 흘려버린다.(중략) 마침내 집안의 물독에 물을 붓는 기쁨은 어디에 비하랴. 쏴아 하고 쏟아지는 물소리에 웃음이 절로 났다. 


물지개소녀 한명숙은 또 연탄불구멍도 잘맞추었다. 


연탄을 이리저리 돌리며 구멍을 맞추는 동안은 숨을 꾹 참아야 한다. 나는 누구보다 빨리 단번에 연탄불의 구멍을 맞출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오랜 동안의 경험이 만들어준 실력이었다. 


한명숙은 가난함 속에서도 행복을 찾을줄 알았다. 작은 것에도 놀라고 기뻐하는 한명숙은 문학소녀였다.  




문학소녀 한명숙은 이화여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이화여대와 서울대가 함께한 기독교 동아리에서 박성준이라는 키 큰 남자를 만났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문학소녀 한명숙은 그와 만나면서 사회참여에 눈뜨게 되었다. 

열린 건 눈만이 아니었다. 한명숙의 마음도 그에게 열려버리고 말았다. 둘은 같이 사랑하고 있었고 누가 먼제 고백하느냐만 남았다. 먼저 고백한 건 여자인 한명숙이었다. 한명숙은 박성준에게 이화여대 쌍쌍파티 파트너를 신청했다. 한명숙은 그날 그가 목에 매고 온  빨간 넥타이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4년 간의 연애 끝에 한명숙은 박성준과 결혼했다. 결혼식장에서 그의 손을 잡으며 한명숙은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꼈다. 아버지는 맏딸을 위해 우렁찬 목소리로 파라다이스란 축가를 불러주었고 친구들은 오색테이프를 던지며 박수를 처주었다. 그렇게 문학소녀 한명숙은 한 남자에게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의 행복은 딱 6개월 뿐이었다. 어느날 한밤중에 환한 불빛이 얼굴로 쏟아지더니 낯선 남자들이 박성준을 끌고가 버렸다. 한명숙은 한동안 남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결혼 1년1개월만인 1969년 1월 25일 한명숙의 남편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한명숙의 남편이 연루된 것은 바로 그 유명한 통혁당 사건이었다.  




25살에 한명숙은 남편과 생이별하여 15년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스스로의 몸도 건사하고 남편 박성준의 옥바라지도 해야 했다. 경제가 좋지 않았던 시절인데다 정치범 남편을 감옥에 둔 여자인 한명숙에게 일자리가 있을리 없었다. 그런 한명숙을 강원용 목사가 불러서 일을 맡겼다.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강원용 목사 아래서 일하면서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명숙은 점차 스스로 생과부라 부를 정도로 안정되어갔다. 

생과부 한명숙에게 그리움은 있어도 그늘은 없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적셨지만 그것이 한명숙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여성사회 교육간사로 일하면서 매일 한명숙은 새로 태어남을 느꼈다. 딸과 아내로 살았던 한명숙의 삶은 여성운동가가 되면서 또렸해지고 선명해졌다. 한명숙에게 삶은 고통이 아니라 경이로운 것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는 깨우친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삶의 희열을 느끼고, 삶을 경이롭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독재권력에겐 위험인물이었다. 1979년 3월 9일 낯선 두 명의 사내가 한명숙을 차에 태워 끌고갔다. 한명숙이 끌려간 곳은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 분실이었다. 


나는 설마 여자에게 고문을 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이 빗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묶어" 나는 무릎이 끓린 채 굵은 오랏줄에 묶였다. 건장한 남자가 옆에있던 야전침대에서 굵고 기다란 침목을 꺼내더니 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 나는 시멘트 바닥에 푹러지고 말았다. 쓰러지자 고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의 번쩍거리는 구둣발이 내 배로, 등으로, 다리로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이 정도는 시작도 아니야. 니까짓 거, 오늘 밤에 죽여서 내바 버려도 몰라. 니 가족도 가만 안둘 거야." 그 말대로 그날은 시작에 불과했다. 어서 빨리 빨갱이인 것을 실토하라고, 배후에 북한의 사주가 있다는 것을 실토하라고 밤낮없이 때리고 찼다. 




한명숙은 구속된지 2년6개월만인 1981년 8월15일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 한명숙은 또 달라졌다. 한명숙은 더욱 공고해지고 확연해졌다. 남편 옥바라지를 잘하는 게 자신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한명숙은 교도소의 비인간적인 생황을 겪은 후 남편의 석방운동부터 먼저 시작했다. 마지막엔 단식까지 했다. 쓰러져 거의 몸을 못가눌 때 쯤 중앙정보부에서 전화가 왔다. 남편이 석방된다는 것이다. 같은 해 12월 25일 한명숙의 남편이 13년 6개월만에 세상에 나왔다. 스물일곱 청년은 마흔한살이 되었고 한명숙은 서른일곱이었다.

한명숙은 고문과 감옥을 견디며 단련되었다. 한명숙은 여성운동을 하면서 채워졌다. 그러면서도 한명숙은 문학소녀의 감수성을 간직했고 물지개소녀의 기억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서른일곱에 한명숙은 남편을 스스로의 힘으로 석방시키며 승리를 경험했다. 단련되고 채워지고 간직하고 기억하고 승리한 서른일곱의 한명숙은 이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 우리사회를 변화의 중심에 섰다. 




세상을 향해 쉼없이 달려온 한명숙이 이제 서울시장이 되려고 한다. 서울시장이 된다면 그에게 어떤 기대를 할 수 있을까? 

한명숙은 물지개를 잘 진다고 했다. 그는 서울시를 물지개처럼 좌우 균형을 맞춰가며 통속의 물이 신경질 내듯 튀지 않도록 잘 질 것이다.

한명숙은 연탄구멍을 잘 맞춘다고 했다. 그는 시정을 결정할 때면 연탄구멍 맞출 때처럼 미세한 차이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숨을 참는 그런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할 것이다. 

한명숙은 문학소녀다. 물지개와 연탄구멍에서도 기쁨을 찾는 한명숙의 감수성은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다. 갈등과 대결은 그 앞에서 꼬리를 감출 것이다.   

한명숙은 사랑을 먼저 고백한 여자다. 그는 일을 벌이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벌이고 난 뒤를 두려워하여 망설이다 시기를 놓치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한명숙은 6개월 산 남편을 13년 기다렸고 단식까지 해가면서 세상에 나오게 했다. 한명숙은 책임질줄 안다. 자신과 삶과 가치와 사랑을 공유한 사람과 언제나 함께한다.

한명숙은 약자인 여자 중에서도 최약자인 남편 없는 여자로서 십수년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삶을 살지 않고 이겨냈다. 약자의 삶을 살아본 한명숙은 누구보다 약자의 고통을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겨낸 삶을 같은 입장의 그들에게 전하려 할 것이다.

한명숙은 고문을 당했고 차디찬 교도소에서 수년을 보냈다. 세상에 몇 안되는 극한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 중 하나이다. 고통 당한 사람의 눈물을 안다. 왜 아프고, 어떻게 아프고, 아직도 아픈지 한명숙은 뼈저리게 안다. 당신과 같이 울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 고통이 멈추도록 도와주려 할 것이다. 

지금 서울은 지쳤다. 서울은 혼란스럽다. 서울은 불안하다. 돈으로 권력으로 건설로 서울을 만들어 왔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 행진을 멈추지 않으면 서울은 갈 수록 피폐해질 것이다. 서울에겐 돈도 권력도 건설도 아닌 사람이 필요하다. 

서울은 지금 한명숙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한명숙은 우리가 힘들어서, 아파서, 불안해서 슬며시 바라보게 되는 바로 사람이다. 물지개를 잘 지고, 아직도 문학소녀의 감수성을 간직하고, 약자의 설움을 알고, 극한의 고통도 알면서도, 승부에는 집중력을 발휘하고 그리고 승리의 기억이 풍부한 한명숙이라는 사람이 서울엔 필요하다.

서울이 사람 한명숙을 택하길 바란다. 



* 인용은 한명숙 자서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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