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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란?
지금의 20대는 상위 5% 정도만이 한전과 삼성전자 그리고 5급 사무관과 같은 '단단한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는 이미 인구의 800만을 넘어선 비정규직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 평균 임금 119만원에 20대 급여의  평균비율 74%를 곱하면 88만원 정도가 된다. 세전 소득이다. 그런데 이 '88만원 세대'는 우리나라 여러 세대 중 처음으로 승자독식 게임을 받아들인 세대들이다. 탈출구는 없다. 이 20대가 조승희처럼 권총을 들 것인가, 아니면 전 세대인 386이 그랬던 것처럼 바리케이드와 짱돌을 들 것인가,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책 앞표지 안쪽)


이 책은 "왜 한국의 10대는 동거할 수 없는가?" 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야" 하며 몇 페이지를 넘기면 곧 이게 말이 안돼는 건 한국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서구유럽에선 18세가 넘으면 독립하는 것을 자신이나 부모 모두 당연하게 생각한다. 부모로부터 독립한 그들은 10대부터 동거를 하기도 하고 함께 혼자 힘으로 대학도 다닌다.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 자산을 조금도 가지지 않은 10대가 독립을 하고 가정을 꾸리며 대학까지 어떻게 갈 수 있단 것일까?

서구유럽은 젊은이의 독립을 위해 국가에서 경제적 보조를 해주고 있다. 대학등록금은 거의 무료이다. 그들은 사회에 새롭게 진출하는 젊은이에게 월세를 50% 이상 지원하는 등의 최소한의 주거권과 생활을 지원하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엔 생애 첫 자금지원 2,000만원이 지원되는데 이 돈으로 스웨덴 젊은이들은 세계여행을 가기도 한다. 우리에겐 놀랍지만 사회에 처음 진출하는 젊은이들에게 평등은 아니라도 형평성은 맞추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겐 당연한 제도이다.

'88만원 세대'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포디즘 시대가 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끝나고 세계적으로 무한 경쟁시대를 맞았다. 오늘날 20대는 이전 세대가 누렸던 안정적인 대량생산과 대량고용을 누리지 못하고 지역과 세대를 가리지 않는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연공서열제 등이 무너지면서 세대간에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이에 따라 사회경쟁에서 최약자인 20대는 세대간 경쟁에서 밀려나 탈락하거나 비정규직 등의  비선호 업종에 종사하면서 사회적으로 착취 당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그들을 일본에선 '비참세대' 이탈리아에선 '천유로세대' 등으로 부르고 있다.

한국의 88만원 세대는 시대적 불리함에다 한국이라는 공간적 불리함까지 같이 겪고있는 실정이다. 세계적 시대조류인 청년실업에다 젊은이의 독립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원 미비로 인해 한국 젊은이가 느끼는 고통은 서구 젊은이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책은 시간보다 공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88만원 세대]는 아직 아무도 답을 내지 못한 세계적 공통현상인 청년실업에 대한 해답보다는 서구유럽이 이미 답을 내놓은 젊은이에게 제공하는 사회안전망을 한국사회에 어떻게 도입할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유럽이 청년사회안전망을 갖추게 된 데에는 사회적 협약도 있었지만 젊은이들의 저항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68년 3월 22일 낭테르 대학에서 8명 학생의 농성으로 68혁명이 발생한다. 6월 5일 끝난 이 혁명은 그 후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일본까지 퍼졌고 세계적인 젊은이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이 혁명의 결과 프랑스 젊은이들은 대학의 국유화와 젊은이의 동거권을 얻게 된다.


일단 혁명이라는 방식을 쓸 수 없다는 것이 이 상황에서의 첫번째 예산 제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19페이지)


그러나 저자는 68혁명과 같은 저항은 한국에서 쓸 수 없다며 선을 긋고 대신 각종 사회적 협약을 제시한다. 정말  저자는 혁명을 거부한 것일까. 그보다는 혁명에 대한 기대를 하지 못하는 것같다.


그러나 한국의 낮은 수준의 젊은 이들이 가능할까. 이미 서유럽청년과 한국 청년의 문제인식 능력은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벌어져 있다." 한 마디로 수준이 다르다"(공저자 박권일, 318페이지)


60년대 거리로 나왔던 당시 프랑스 고등학생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라는 철학책을 누구나 읽었다고 한다. 68혁명은 이러한 프랑스 젊은이들의 지적 수준이 받쳐주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고등학생이 아니라 대학생도 60년대 프랑스 고등학생만큼의 독서와 사고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월드컵 승리에 대한 애국주의적 열광은 가능하지만68혁명에서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저항만 한 프랑스 학생들의 철학적 저항은 뒤따르긴 힘들 것이다. 정치권도 손대지 못할만큼 한국의 공교육은 붕괴되 버렸다. 이제 남은 희망은 교육소비자인 학생들의 저항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공교육 붕괴 때문에 학생들은 혁명을 위한 문제인식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87년 6.10 항쟁으로 한국의 젊은 세대는 진보적 가치를 몸에 새겼다. 그렇게 새겨진 가치는 한국젊은이의 정치성향을 지난 십몇년간 진보적으로 유지했다. 저항은 사회의 건강을 위해 불어넣는 숨결같은 것이다. 저항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 관료와 정치인은 긴장을 잃고 오만해질 수 있다. 사회를 정치만으로 작동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정치가 나태해지고 유착할 때 저항이 나타나야 한다. 사회적 저항은 결코 부적절한 것이 아니다. 저자 우석훈이 "혁명이라는 방식을 쓸 수 없다"고 한 것도 저항의 부적절함이 아니라 가능성 없음 때문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 표지에 적힌 문구를 봐도 그는 20대 저항의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책표지 맨 위)



그럼 저자의 말대로 사회적 협의는 가능할까. 합의를 하기 위해선 기성세대의 양해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20대를 삐닥한 눈으로 보는 기성세대가 20대를 위한 사회적 지출을 허락할 것 같진 않다. 현재 50대 60대는 10대를 사교육 명목으로 인질 잡고 20대를 더 착취하고 있다. 사교육 비용때문에 20대에게 줄돈이 없다고 분통을 터뜨릴게 뻔하다. 30, 40대도 호의적이지 않다. 사회를 변혁시킬 것처럼 나섰던 386들은 오히려 현재의 사교육열풍과 이민출산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각 사회에 진출해서 민주화를 이끌어 내겠다던 그들이 이미 많은 곳에 진출했지만 사회는 여전하다. 게다가 한국의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배가 불러서 그렇다"는 등의 군국주의 문화에 비롯된 극언을 서슴지 않고 해대는 잔인한 세대다. 서구처럼 아이들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세대가 아니다. 이렇게 세대간의 소통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정치적 타협은 사실상 어렵다고 봐야 한다. 저자는 기성세대에게 꼰대가 되지 말아야 한다며 그게 남아있는 가능성이라고 말하지만 책 전반엔 가득한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으로 봤을 때 이 말은 20대에게 보내는 신호로 보인다. 결국 그들은 꼰대니까 니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88만원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만의 바리케이드와 그들이 한발이라도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필요한 짱돌이지, 토플이나 GRE 점수는 결코 아니다. 엄폐물 없이 은폐되어 있는 20대가 하나의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는 과정, 이 흐름은 개별적으로 입사 시험 보면서 단단한 직장을 잡는 과정과는 조금 다르다.(289페이지)

 그 어느 편이라도 좋다. 사회 특히 기성세대가 자신들을 지키는 바리케이드를 20대와 공유하지 않으려고 하는 현 시점 20대도 어떤 식으로든지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가지려고 노력해야할 필요가 있고, 그들의 요구가 조금이라도 새로운 반전의 계기를 찾을 수 있도록 작은 짱돌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발생하지 않으면 20대들은 '은폐'되어 고립되고, 파편처럼 공격받으며 오히려 기성세대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290페이지)


결국 이 책은 조심스럽게 혁명으로 돌아온다. 20대 스스로 게임의 법칙 변경을 요구하라고 한다.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위해 바리케이드 치듯 20대도 바리케이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선 20대도 작은 짱돌 저항 정도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작은 짱돌? 저항의 크기를 우리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까. 저항이 한번 터지면 그 억압과 부조리만큼의 크기에 상응하게 커질 수밖에 없다. 그건 혁명이 될 수도 있고 의사표시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나서 68혁명을 찾아 읽고 싶어지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한 한국정치권에 대한 경고이다. 한국정치는 사교육과 청년실업 등의 문제에서 분명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정치인과 관료가 이익세력에 휘둘리면서 적당한 방향을 잡다가 정책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제 정치권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많은 사람들이 접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이제 남은 길은 저항일지도 모른다.



경쟁이 극대화되어 있으면서 시스템의 효율성은 극도로 떨어진 사회를 흔히 중남미형 경제라고 부른다. 지금 한국은 미국형 사회의 첫 발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중남미형 경제로 깊은 발을 내딛은 상태이다.(305페이지)





* 이 책이 중요한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가끔 신뢰를 잃는 부분이 386과 노무현정권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다. 박정희정권 등 모든 정권의 정책을 긍정하면서도 노무현정부에 대해선 독설을 날린다. 신뢰를 잃은 것은 비판이 아니라 그 비판에 근거 없음이다. 노무현 정부의 선택과 집중이 기업으로 하여금 선택받기 위한 확일화를 부추겨 양극화 등의 사회문제를 가속화 시켰다고 하면서 그 구체적 사례나 인과관계는 밝히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개발사업으로 지방의 농지가격이 치솟을 대로 치솟아 젊은이의 개별 귀농이 어렵다는 부분에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의 땅값이 그렇게 많이 올랐다는 것도 금시초문이고 올랐다 해도 모두 농촌을 떠나는 마당에 귀농이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정치적 성향 때문인지 시의성을 유지할려는 의도였는지 모르나 그 덕분에 책의 신뢰성이 많이 상실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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