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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제도에 대한 희의

마지막 생존자 네빌 중령이 영화에서 회상하는 장면은 인류의 멸명이 아니라 가족의 죽음이다. 탈출하려고 매달린 사람들 때문에 휘청거리는 헬기가 네빌중령의 가족이 탄 헬기를 덮치고 그의 과거 회상은 거기서 끝난다.

네빌은 전형적 중산층이다. 중산층에게 가족의 의미는 다른 계급보다 더 각별하다. 빈곤층처럼 가진 게 너무 없으면 가족의 구심점이 사라져 가족은 해체된다. 부유층처럼 너무 많이 있으면 가족은 각자 따로 누린다. 가족간의 유대가 형성되기 힘들다. 증산층은 가족이 함께 누리기에 적당한 물질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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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네빌에게 더 중요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가족이다. 어둠 속에서 샘(개)을 부르는 네빌의 애타는 목소리는 아이를 찾는 아버지의 목소리다. 마지막 가족인 샘이 죽자 네빌은 자살을 시도한다. 그로선 가족이 없는 세상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족의 죽음은 곧 세상의 멸망이다.

이런 네빌에게 사람은 가족과 가족이 아닌 사람 두 가지로 나뉜다. 뉴욕시를 탈출하는 장면에서 네빌은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냉혈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괴성을 지르며 발악하지만 자신의 아기만이라도 데려가달라는 어머니의 피눈물은 싸늘히 외면한다.

인류의 멸망 후 처음 만난 사람인 안나를 만났을 때 네빌은 전혀 반가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첫 대면에서 그들에게 총을 꺼내들고 극도의 경계심을 보여줬다. 안나의 몇마디에 신경이 거슬려 화를 내기까지 했다. 안나와 그의아들은 전날 죽은 샘같은 가족이 아니었다.

네빌은 변종인류를 실험대상으로 써서 수십명을 죽인다. 변종인류이지만 그들도 인간이다. 영화 마지막 실험 중이던 변종인류가 치료된 모습은 그들도 치료에 의해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그들을 죽인 것은 명백한 범죄다. 네빌이 변종인류를 실험대상으로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죽어도 괜찮은 변종인류라서가 아니라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런 점에서 변종인류가 네빌을 공격한 것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정당하다. 자신들의 동료가 네빌에 의해 죽는 것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가족을 잃으면 어쩌지' 하는 인간의 가족부재의 공포에 관한 것이다. 네빌의 공포가 왠지 낳설지 않았던 것은 그 공포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느끼는 공포이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에도 들어오지 않는 남편, 몇시간째 전화를 받지 않는 아내, 학교에서 안돌아오는 아이, 이런 것들로 우리는 공포에 사로잡혀본 경험이 있다.

먼 나라의 지진으로 수만명이 죽은 소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버리지만 자기 아이의 작은 고통엔 눈물까지 흘리는 게 인간이다. 이게 과연 올바른 모습일까. 수만명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가족의 부재를 너무 과도하게 슬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가족부재의 공포가 인간을 가족단위로 닫게 만들고 그 공포로 인해 어떠한 가족이기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게 한다. 만약 가족이란 제도가 없었다면 우리가 느끼는 인류의 멸망과도 같은 가족부재의 공포는 덜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고통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족제도는 회의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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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독실한 기독교신자일까

네빌은 과학자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다. 영화초반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라는 벽에 쓰인 커다란 문구를 옆의 폐허와 함께 보여주는 조롱이 담긴 장면에서도 네빌의 신에 대한 생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네빌의 주변엔 신을 믿는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

네빌의 부인은 독실한 기독교신자다. 네빌과 헤어지는 그 급한 와중에 기도를 올리는 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신지인지 알 수 있다.

그를 구해준 안나는 한 술 더 뜬다. 안나는 네빌을 구해준 것은 신의 계시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생존한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라고 전해주었다는 말도 한다.

네빌은 이런 안나의 광신적 행태에 분노한다. 그건 인류를 이렇게 멸망시킨 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는 합리적 분노였다.

그러나 안나의 목덜미에서 네빌의 딸이 말하던 나비를 발견하고서 네빌은 마지막 순간 신을 믿기로 한다. 그녀에게 자신의 혈청을 주며 모여사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약을 만들게 하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안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에 도착하고 영화는 안나의 신에 대한 말이 모두 맞았음을 확인해준다.

여기에 대해선 두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첫째, 작가가 독실한 기독교신자일것이다. 기독교에 관한 작가의 서술은 너무나 명쾌하다. 신을 믿지 않는 네빌이 결국 신을 믿게 되어 반갑다는 얘기다. 작가의 종교적 입장이 반영된 영화라고 보면 그만이다.

둘째, 작가가 기독교신자는 아니지만 종교를 긍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약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지침을 주는 종교는 신의 존재여부와 상관 없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이 신이란 절대적인 존재 없이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냐는 것이다.

좋게 보면 두번째겠지만 아무리 봐도 이 작품의 작가는 첫번째라는 느낌이 든다. 영화의 서술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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